그런데 백행이 안 되는
묵직한 시가를 한 대 피면서 절대 거절 못할 제안을 해보고 싶다.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왔다고 말하는 대학교수의 집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사랑하는 강아지를 잔인하게 죽인 마피아들에게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해보고 싶다.
이상한 사람이 내미는 빨간 약과 파란 약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할지 고민해보고 싶다.
죽은 친구의 유언장대로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오래전 함께 추었던 춤을 춰보고 싶다.
이마에 흉터를 보여주면 이상하게 다들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
나를 때리던 사람을 쏴 죽이고서 화장실로 도망가 느릿하게 춤을 춰보고 싶다.
형사 뒤에 앉아 심문하지 않고 이상한 질문을 할 때마다 피아노 건반을 세게 쳐보고 싶다.
짝사랑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옥상 건물을 미친 듯이 달리며 살인 가스를 피하고 싶다.
맷돌의 손잡이가 없을 때를 차분하게 알려주며 번들거리는 눈을 치켜뜨고 싶다.
면접장에서 마주친 그녀에게 용기 내어 커피 한잔하자 물어봤는데 이름이 ‘가을’이라는 대답을 듣고 싶다.
검은색 비니와 동그란 선글라스를 쓰고 어린 그녀의 손을 잡고 걸어보고 싶다.
엘리베이터에서 ‘들어와’라고 외치며 피투성이 손짓을 건네 보고 싶다.
부디 아들만은 살려달라는 관상가에게 다가가 ‘내가 왕이 될 상인지’ 다시 한번 묻고 싶다.
‘아침에 창문을 열었을 때 생량한 바람이 가을을 예고해줍니다’라고 적힌 편지를 읽어보며 촌스럽지만 클래식하다고 말하고 싶다.
말다툼하는 부부를 피해 자리를 내 옆으로 옮긴 그녀에게 말을 걸어 함께 여행하고 싶다.
홀로 고립된 화성에서 ‘좆됬다’라며 유언장 대용 비디오를 찍어보고 싶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공들여 쓴 원고지를 품에 꼭 안고 클래식 자동차를 타고 과거로 가고 싶다.
베이컨과 달걀을 팬에 올리고 구우면서 달걀 껍데기를 불에게 먹여주고 싶다.
늑대에게 길러진 소녀가 찌르려 할 때, ‘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라고 말하며 살려주길 기대하고 싶다.
우리 집안 남자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알려주며 넌 뭘 하고 싶는지 물어보는 아버지에게 ‘사랑’을 하고 싶다며 답하고 싶다.
적 탱크를 마주했을 때 어두운 탱크 안에서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전차포를 쏘고 싶다.
싸우기 위한 모임에 온 사람에게 첫 번째이자 두 번째 규칙인 ‘모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며 소리치고 싶다.
호화로운 여객선 티켓을 도박으로 따고 그 속에서 만난 부잣집 딸과 사랑에 빠지고 싶다.
신에게 온갖 쌍욕을 퍼붓다가 뜬금없이 신과 대면해서 신의 능력을 얻어보고 싶다.
입에 은색 스프레이를 뿌리고서 나를 기억해달라고 열광하고 싶다.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도 손은 눈보다 빠르다며 밑장 빼기를 해보고 싶다.
‘모쿠 슐라’라는 게일어가 씌어준 후드를 뒤집어쓰고 라운드에 올라가 싸우고 싶다.
나를 속여먹은 재즈 지휘자를 무시하고 내가 신호하겠다며 미친 듯이 드럼을 치고 싶다.
굳은 얼굴에 칼을 들이대고서 기괴하게 웃으며 뭐가 그리 심각한지 물어보고 싶다.
자전적 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출판 홍보 여행 차 들린 파리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보고 싶다.
이 세상의 절반을 위해, 내 목숨을 바쳐 손가락을 튕겨보고 싶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꿈 또는 현실 속에서 작은 팽이 하나를 돌려보고 싶다.
총과 포탄이 오가기 시작한 벌판을 가로질러 장군이 내려준 명령서를 전달하고 싶다.
친구에게 키스란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파리처럼 손을 미친 듯이 비비고 싶다.
치아가 달린 마치를 끌고서 흑인 노예를 구해 현상금 사냥을 하러 떠나고 싶다.
검은 가죽장갑을 벗고 쇠로 된 손가락을 보여주며 ‘손가락 귀신’과 대결하고 싶다.
전당포에 금이빨은 받으니까 나머지는 모조리 씹어먹어 주겠다는 사람이 되고 싶다.
몰디브 가서 모히토나 한잔하자고 하는 그녀에게 ‘추억은 가슴에 묻고 지나간 버스에는 미련을 버려’라고 말하고 싶다.
낡은 여행 서점에서 우연히 손님으로 온 유명 여배우와 사랑에 빠지고 싶다.
동전 던지기 내기를 하고 상대방이 맞추면 ‘행운의 동전이니 돈 통에 같이 넣지 말고 따로 보관해라.’라고 하고 싶다.
뱀의 언어로 숨겨진 통로를 찾아내 안에 있는 거대한 괴물을 칼로 찔러 죽이고 싶다.
야구단장에게 ‘선수를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승리를 사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다.
위장전입으로 들어간 치킨집이 너무 장사가 잘돼서 ‘왜 장사가 잘되냐고!’ 화내고 싶다.
늙어서 은퇴한 시기에 시니어 인턴이 되어 직원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싶다.
몰래 쳐다보던 이들에게 ‘좋은 아침, 좋은 점심, 좋은 저녁 되시길’이라고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
불리한 상황에서 두들겨 맞으면서도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어’라며 다시 일어서고 싶다.
나를 영입하려고 술을 사는 서커스 단장에게 수익을 7대 3으로 나누자며 춤추고 노래하고 싶다.
고집 그 자체가 된 늙은 독재자에게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고 말하며 총 쏘고 싶다.
악령에 빙의된 소녀의 퇴마를 진행하며 내 이름을 한 글자씩 귓가에 속삭여주고 싶다.
손에 난 피로 배구공에 얼굴을 그려주고 이름을 붙여주어 친구 삼고 싶다.
외계인을 목격한 사람에게 진정하고 이 빛을 잠깐 봐달라고 말해보고 싶다.
재즈 바에서 만난 옛사랑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며 이랬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고 싶다.
혁명을 준비하는 젊은 동료들 사이에서 붉은색은 불타는 영혼이요, 검은색은 그녀가 없는 세상이라며 사랑을 노래하고 싶다.
큰 힘에는 큰 책임감이 따른다는 삼촌의 말을 기억하면서 사랑하는 연인을 뒤로하고 뉴욕의 빌딩을 날아다니고 싶다.
죽을게 뻔한 전투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병사들과 눈을 마주치며 '그대의 눈동자 속에서 나와 똑같은 죽음의 공포를 보았다. 그러나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이 아니다!'라며 연설을 하고 돌격 명령을 내려보고 싶다.
모든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고서 오늘은 어떤 기적이 생겨날지 기대해보고 싶다.
벽장 속의 세계로 넘어가 위대한 사자를 만나고 갈기를 쓰다듬어보고 싶다.
하늘을 나는 빗자루에 올라타서 날아다니는 작은 황금색 공을 움켜쥐고 승리를 만끽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