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일했던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 군을 제대하고 나서, 나는 꽤 오래 잘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회사에 들어와서 더 적게 잤다. 처음엔 5시 30분에 일어나서 5시 55분 셔틀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그 시간에 버스를 타고 출근하면 사무실에는 불조차 꺼져있었다. 다른 부서 사람을 포함 하서 50여 명이 넘는 한 층에 나 보다 일찍 오는 사람은 딱 2명이었다. 대리 한 분과 과장 한분. 그렇게 도착해서 자리에 앉으면 6시 20분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일을 하다가 7시가 되면 자전거를 타고 현장으로 나가서 보급소를 들렀다. 그리고 8시 30분에 자리에 돌아와서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랬던 내가 요즘은 7시에 버스를 타고 7시 30분에 출근했다. 물론, 그래도 충분히 일찍 오는 거지만 말이다.
12.
나는 주로 도장 부서와 많이 싸웠다. 전화로, 회의로, 메일로. 이유는 간단했다. 예산이 부족해서였다. 내가 다루고 있던 소모품 예산은 총 405억. 그중에 안전 보호구의 예산인 123억을 빼고, 소모품 예산인 282억 중에서 전사에 지원을 해야 했다. 내가 복직했을 당시 인원은 4만 5천여 명. 그리고 시간이 지날 수 록 아주 찔끔찔끔 인원이 줄어서 내가 퇴사를 앞둔 지금에는 3만 8천여 명이 되었다. 원래 회사의 예상으로는 지금 인원이 2만 8천여 명이어야 했다. 여기서부터 도장부서와 우리 부서, 특히 나와의 충돌은 심해졌다.
도장부 : 도장하는 사람 인건비가 얼만 줄 아냐, 지금 녹을 제거 못하면 결국 배를 제시간에 인도 못한다. 소모품 좀 사달라. 아니면 우리 일 못한다.
생산지원부 : 우리가 줄 수 있는 예산은 다 줬다. 예산 범위 내에서 알아서 해라. 회사가 어려운데 예산을 어떻게 더 쓸 수 있냐.
사실, 나는 일을 하면서 예산을 크게 초과했다. 초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에게 임 차장은 늘 한소리를 했다.
"우리는 우리 부서를 위해서 일 해야 해. 예산이 초과되면 부서장님이 힘들고 나도, 너도 힘들어. 다른 부서에 예산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지. 회사가 어려운데 더 줄여야지."
그렇게 해서 예산을 줄이는 각종 캠페인을 벌이고 프로젝트를 시행해봤자, 어차피 윗줄 타고 내려온 제품을 쓰면서 절약한 예산보다 돈을 더 쓰는 현실이었다. 임 차장은 상반되는 지시를 내렸다. 아니, 회사는 상반되는 지시를 내렸다.
"고객만족과 원가절감을 해라."
고객은 다른 생산 부서를 말했다. 그중에서 가장 예산을 많이 잡아먹는 것은 도장 부서였다. 철판에 핀 녹을 제거하기 위한 연마재가 꽤나 비쌌다. 그 덕분에 선행도장부, 해양 도장부, 도장 1부, 도장 2부와 수시로 회의하면서 예산을 가지고 씨름하고, 더 저렴한 소모품을 찾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자그마치 6개월이었다. 그 덕분에 도장부의 예산을 담당하던 이 과장, 가장 힘들다고 연락이 많이 왔던 정 과장, 연구소에서 제품 성분 test를 해주던 현 대리, 조달 부서에서 입고 일정을 조정해주던 나대리는 상당히 친해졌다. 퇴사를 결정했던 그다음 날, 그들과 회의가 있었다.
야드 밖의 건물에서 근무하던 나대리를 제외하고 이 과장과 현 대리, 그리고 해양 도장부의 정 과장과 회의를 하던 중이었다. 빌어먹을 원가절감 때문에 우리끼리 회의를 참 많이도 했었다. 제품 선정, 샘플 test, 현장 test, 현장 도입까지 말이다. 그 결과를 공유하는 자리에서 역시나, 문제가 튀어나왔다.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새로 도입된 연마재가 분진이 너무 많이 날리고, 작업 효율이 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자, 이 과장이 독 바닥에 쌓여있는 분진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번에 도입된 연마재는 색상도 검고, 분진이 너무 많아서 작업자들이 많이 꺼려요. 이대로는 작업하기 어려울 듯하네요."
그러자 옆에 있던 해양 도장부 정 과장이 거든다.
"해양 도장부에서는 이거 못써요. 이걸로 블라스팅 작업을 하면 조도가 안 나와요. 계약사항에 연마재를 뭘 쓰는지는 안 나왔는데, 조도는 꼭 지켜야 하거든요? 그냥 기존에 쓰던 걸로 주셔야 해요. 아니면 이번 진수 일정 못 맞춰요. 진짜 큰일 나요. 류사원 님."
그러자 같이 test를 진행했던 현 대리가 도와주었다.
"아니, 원래 작업자들은 처음에 거부반응이 심한 거 아시잖아요. 일단은 다독여서 조금 더 써보고 익숙해지면 괜찮아지지 않을까요? 해양 도장부는 조도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치고, 도장 1부, 2부는 그대로 쓰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나도 거들기 시작했다.
"해양 도장부는 조도를 맞춰야 하니까 기존 연마재가 입고되면 바로바로 도장 1부와 연락해서 가져가시고, 도장 1부, 2부, 그리고 선행 도장까지는 가급적 신규 연마재로 사용해주세요. 아시잖아요, 단가 차이가 2배 가까이 차이 나는 거. 이거 안되면 진짜 예산 못 맞춰요."
사실 이미 예산은 초과돼서 탈탈탈 털린 지 오래다. 다만, 조금이라도 초과한 범위를 줄이려고 열심히 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 그리고 앞으로는 예산 관리랑 이런 회의는 다시 임 차장님이 주관하실 거예요."
나는 회사에 복직했을 때부터 이런 자리에 버려진 적이 많았다. 임 차장이 꽤 바쁜 듯이 행동했기 때문에 내가 회의를 잡아놓고 보고를 하면, 정작 임 차장은 다른 자리에 가있어서 내가 회의를 주관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아, 지난번에 말씀하신 부서이동 건 때문에 그런 거예요? 어디였더라, 품질경영부로 안다고 했죠? 아니, 여기 자리 비는데 여기로 올 생각은 없어요? 내가 잘해줄게요."
이 과장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가면 열심히 굴릴게 뻔히 보였다. 그 사이, 현 대리와 정 과장이 말하는 게 들렸다.
"아, 류사원 부서 이동해요? 왜요? 저랑 같이 다른 소모품도 test 해야 되는데."
"아마 분사 추진 이야기 때문에 그럴걸요. 그거 따라가면 협력사랑 똑같잖아요."
나는 살짝 목소리가 떨리는 걸 느끼면서 말했다.
"저 이번 달 18일에 퇴사해요."
반응은 다들 비슷했다.
"엇어? 그만두고 뭐하려고요?"
"그럼 일은 누가....... 아, 임 차장님이 다시 해요? 큰일 났네. 소모품 지원 잘 안 해줄 텐데."
"송별회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싶네요."
그러다가 순식간에,
"그럼 내일모레 다들 시간 괜찮으세요? 이때, 송별회 하는 걸로 하죠. 여기에 나대리도 불러서."
"그래요, 그럼. 그때 저기 중국집 가서 고량주나 한잔 해야겠네."
일처리는 느릴지 몰라도, 회식 일정은 누구보다 빠르게 잡는 사람들이 중공업 사람들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래도 신경 써주는 그들이 너무 고마웠다. 내가 업무를 맡으면서 모르는 것도 많고, 예산도 줄이면서 그들이 가장 힘들었을 텐데 말이다. 예산은 회사에서 줄였는데 욕은 늘 우리가 다 먹었다.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그전까지 필요한 거 있으시면 미리미리 말씀해주세요. 필요한 시점에 들어올 수 있도록 구매 신청해놓을게요. 아니면 임 차장님께 연락하셔도 됩니다. 하하하."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예산을 관리하면서 얼굴을 붉히는 일도 많았고 욕먹고 고함 소리를 듣는 것도 많았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였지만, 버티기는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실제로 예산을 쓰는 권한은 임 차장과 부서장에게 있었고, 나는 방패막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성과보다 내가 편하게 일을 하고 싶었다. 예산을 초과시키더라도 현장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싶었다. 내가 본 현장은 소모품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으니까 말이다. 낭비를 줄이기 위해서 우리는 초가삼간을 다 태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상관없었다. 더 이상 나의 일이 아니라 임 차장의 일이었다. 임 차장은 소모품에 대한 일을 전부 나에게 주었다. 각종 안전보호구, 소모품, 연마재의 구매신청, 품질개선, 보급소 환경 점검까지 말이다. 그 모든 일을 다시 임 차장에게 돌려드릴 예정이었다. 과장님과 대리님께 인사를 드리고 회의실을 빠져나오니 속이 후련한 게 느껴졌다. 발걸음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