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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도둑 May 25. 2022

500

우체국에서 1호 박스를 사면 500원이다. 인터넷에서 대량 구매하면 개당 254원. 커피 원두와 드립백을 포장하다가 문득 박스와 인연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일하는 곳에는 늘 박스가 있었다.


내가 처음 다녔던 회사는 조선소였다. 조선소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일을 하기 때문에 소모품 또한 수시로 보급받아야 했다. 내가 일하던 야드에는 20곳이 넘는 보급소가 있었다. 그 보급소에서는 그라인더 디스크, 테이프, 마스크와 필터, 청소도구와 안전 보호구, 공구들이 가득했다. 군대를 막 제대하고 들어간 사무실은 야드 중간에 있었다. 상사의 조언 겸 강요에 따라서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현장을 돌았다. 자전거를 타고 현장 보급소 소장님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간혹 술 마시고 못 나온 사람의 보급소에 가서 일손을 거들었다.


거드는 일이란 단순했다. 박스를 까서 빈 곳을 채우는 일. 까대기. 몇 박스씩 테이프를 뜯고 박스를 접었다. 그때가 박스와 첫 만남이다. 테이프 끝을 잡아 뜯는 게 아니라 박스를 찌그려트려서 공간을 만들어서 뜯는 게 편하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박스는 퇴사 후에도 다시 만난다.


카페에서 일할 때는 격일로 택배가 왔다. 부족한 원부재료를 주문했고 시즌마다 각종 MD가 도착했다. 그때는 한 시간씩 까대기를 했다. 까서 정리하고 까서 정리하고. 보급소의 박스와는 다르게 병이나 텀블러, 커피 원두 같은 손상되기 쉬운 것들이 있어서 조심조심 커터 날로 뜯었다. 물론 박스를 펼쳐서 접을 때는 주먹으로 내리치는 게 빨랐지만.


카페를 그만두고 작은 로스터리를 창업한 지금은 박스를 까는 게 아니라 포장한다. 어쩌다 보니 박스와 연이 깊다. 박스를 포장하던 까던 은근히 다치기 쉽다. 일단 박스의 종이 재질이 단단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종종 날카롭게 잘린 단면도 있다. 그래서 종종 빠르게 손을 놀리다가 어느새 붉게 물든 손가락을 볼 수 있다. 보통은 바쁜 매장에서 박스를 까다가 베였다. 근데 요즘엔 포장하는 일이 아직 적다 보니 아직까지 박스 포장 때문에 다친 적은 없다.


스마트 스토어와 연동되는 굿스플로와 택배 계약을 한 이후로 아직 첫 주문이 안 들어왔다. 송장 출력부터 배송까지 거쳐야 하는 과정이 많은데. 이 외에도 세금이나 세금계산서 발행 등 익숙하지 않은 일이 투성이다. 얼른 익숙해질 만큼 일이 들어오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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