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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주택살이 현실 - 2탄

지하수, 유지 관리 그리고 문단속에 관한 이야기

by 반쯤 사이공니즈


다양한 여러 생물들과 집을 공유해야 하는

현실을 이야기한 1탄에 이어, 이번에는

더 현실적인 부분들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전편을 읽지 않은 사람을 위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내가 베트남에 와서 처음으로 살았던 주택은 방 6개, 화장실 7개가 딸린 4층 주택이다. 정보제공보다는, 15년쯤 전의 주택생활에 관한 나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한 글임을 알아주시길 바란다.



베트남에 처음 왔던 15년 전쯤,

우리 가족이 주택에서 가장 먼저

겪었던 문제는 ''이었다.


생수는 사 먹는데, 한국에서는 주로 정수기 위에 꽂혀있는 그 20리터짜리 생수통을 베트남에선 가정에 두고 생수로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브랜드는 라비에 (Lavie) 혹은 아쿠아피나 (Aquafina)를 마셨으며, 물 가게에 전화로 주문하면 배달받을 수 있었다.


보통 한 번에 4-5통을 시켜서, 쇠로 된 물통 거치대 위에 올려서 사용했다. 물통 아랫부분에 수도꼭지가 달려 있어서 높은 곳에 올려두고 바로 물을 받아서 사용했다. 물을 다 먹으면 빈 통은 새 물통을 가져다주면서 다시 수거해 간다.

라비에 19.5L 짜리 물통 사용법

오토바이로 생수통을 한가득 실어와서 집안 원하는 곳까지 들어와 놔 주었다. 턱턱 바닥에 내려놓을 때 플라스틱 두꺼운 통이 울컥 어그러지면서 물이 출렁거리는 소리가 났고, 빈통들을 양손에 2개씩 집고 갈 때는 통들이 서로 부딪히며 탕탕거리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식수는 판매하는 생수로 해결했지만, 생활용수가 문제였다.

우리 가족은 베트남에 건너온 뒤 물갈이를 경험했다. 냄새에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어도 물에서 나는 비릿하고 퀴퀴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정도였고, 피부에 트러블이 많이 올라서 한참 고생했었다.


환경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찜찜한 마음을 떨칠 수 없던 어머니가 집주인에게 물어보니, 돈을 아끼기 위해 수도시설을 다 갖춘 집임에도 지하수를 사용하게 해 두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바로 수돗물로 교체를 하였고, 비릿한 냄새가 사라졌다. 하지만 수돗물 또한 석회수였기에, 양치를 할 때는 꼭 생수나 생리식염수로 입을 헹구곤 했다.


당시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던 수도 현실은 이러했다. 15년 전쯤 베트남은 수도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도시 외곽은 수돗물 공급이 불안정하거나 아예 수도가 연결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고 하는데, 비용절감을 위해 대신 사용하던 지하수는 암모니아, 철, 중금속등 오염된 물로 위생과 건강에 좋지 않았다. 우리가 맡은 비릿한 냄새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지금은 수도시설이 더 발전되었고, 다양한 필터나 정수기를 가정 내에 설치하기 편리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수돗물을 식수로 사용하진 않는다.

주택은 청소, 관리

생각보다 더 힘들다.


깔끔하시던 우리 부모님은 그 커다란 집을 항상 쓸고 닦으셨는데, 기본 2미터가 넘는 높은 천장에 생기는 거미줄은 날을 잡고 사다리를 타거나 기다란 청소솔이 있어야만 제거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해가 쨍쨍 내려쬐는 옥상에서는 빨래가 참 잘 말랐지만, 1층에 있던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4층을 올라가는 것도 큰 일이었다. 비가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우기때는 매번 천장 창문을 닫고, 빨래를 걷으러 미친 듯이 뛰어 올라가야 했다.


그래서 주택에서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꼭 필요했다. 우리 주택에도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상주하실 수 있는 작은방이 있었다.


신뢰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운이 따라야 했기에 주변 한인들의 가사도우미들과의 갈등, 도난, 소통에 대한 문제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작게는 샴푸나 린스 같은 것은 조금씩 덜어서 가져가거나 장을 보고 온 돈을 남겨 챙기고, 크게는 돈이나 핸드폰 같은 것들을 훔쳐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언어소통이 안돼서 생기는 갈등도 적지 않았다.


우리는 픙 (Phuong)이라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밥, 빨래, 청소 모든 가사를 도와주셨다. 어머니는 매일 새벽부터 픙 아주머니 자전거 뒤에 타고 같이 시장으로 장을 봐오셨다.

대부분 오전 5시부터 열린 아침장은 7시가 되기도 전에 끝났기에 새벽 5시부터 집을 나섰던 두 분의 수고스러움은 지금 생각해도 존경스럽다.


그 시절 한국인들 중 직접 장을 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서 픙 아주머니는 경험하고 배우려고 하는 어머니를 유독 좋아하시고 챙겨주셨고, 오빠와 나도 아껴주셨다. 그렇기에 우리 가족과 1년 정도 함께 하신 뒤, 고향에 돌아셔야 했던 픙 아주머니와의 이별은 참 아쉬운 기억으로 남았다. 어머니는 아직도 픙 아주머니가 보고 싶다며 그리워하시곤 한다.


마지막으로 보안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푸미흥이라는 한인이 많이 사는 부촌지역은 치안이 좋다. 푸미흥사에서 관리하는 경비들이 구석구석 순찰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당시 내가 살았던 동네는 한인들이 비교적 많았지만, 따로 관리되지 않는 일반 주택가였다.


우리 집도 한 번 도둑이 든 적 있었는데, 이 사건이 아주 기이하다.


당시 주변에 살던 한국인들이 우리 집에 모여 점심을 먹게 되었다. 또래 친구들과 위층 오빠 방에서 모여 놀다가 밥 먹으란 소리를 듣고 모두가 1층으로 내려갔다.


유독 촉이 좋은 아버지가 갑자기 2층 안방의 창문을 닫았는지 확인해 보라며 큰소리로 소리쳤다.

도둑이나 빈집털이 사건이 빈번하진 않았지만, 집주인이 주택은 발코니 같은 창문으로 침입하는 경우가 있다고 특히 창문을 잘 잠그고 지내라는 주의를 주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2년간 살면서 큰 문제는 없었기에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외침이 긴장감을 조성했다.


어머니가 급히 올라가 보니, 창문과 발코니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옆집 현관 지붕 위 여권과 중요한 것을 넣어둔 가방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아버지가 건너가 가방을 확인해 보니, 한국에서 쓰던 핸드폰이 없어져 있었다. 마침 그날은 옆집이 이사 간 날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옆집이 이사를 가면서 누가 우리 집에 들어와 훔쳐간 것으로 생각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한국인 지인으로부터 어떤 한국인이 새로운 핸드폰을 구매했는데, 그 안에 내 사진이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


그 사람은 한인업체를 통해 중고 핸드폰을 구매했고, 그 핸드폰이 누구로부터 유통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범인은 외부에 있는 누군가가 아닌, 그날 우리 집에 있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이 한참 뒤에야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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