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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과거가 내 발목을 붙잡는다면

진짜 '나'는 누구일까

형제라곤 달랑 둘 뿐인 우리 자매. 언니랑 투닥거리며 친구같이 자란 나는, 내 고집이 없진 않았지만 그 고집이 길게 가진 않는. "평화와 너의 심지를 택하려면 어떻게 할래?"라고 한다면 평화를 택하는 그런 아이였다.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며 싸우다가도 상대방이 영 세게 나오거나 이 일로 갈등이 지속될 것 같으면 내가 먼저 숙이고 들어간다고 해야 할까. 어릴 때 방문을 서로 밀며 싸우는데(예를 들어 언니는 열겠다고, 나는 닫겠다고) 결국 언니가 살짝 벌어진 문 틈으로 손을 들이밀면 나는 결국 문을 열고야 마는 쪽이었다. 그렇다고 언니가 어딜 가서든 그렇게 센 사람이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동생이 본인 손을 다치게 하진 않을 거란 확신은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내가 손을 넣으면 결국 내가 먼저 손을 빼기도 했었다. 언니는 한다면 하는 사람 같았고, 나는 왜인지 자신이 없었다. (오해는 금지, 지금도 언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누군가와 싸우고 나서도 마찬가지. 내 생각에 내가 맞는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금방 기분이 풀어졌다. 상대방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나는 이렇게 하길 바라긴 했지만, 상대방도 그런 마음이었겠지. 내가 조금 바꿔볼까? 화해하는 게 중요하잖아."

그런데 문제는 이런 나의 방식을 상대방도 그러길 바랐다는 데 있다. 내가 먼저 풀리고, 손 내밀고, 내가 잘못한 부분을 생각해서 바꿔보려 노력한 것처럼 상대방도 그래주길 바라는 것.

그렇지 않고 상대가 계속해서 본인의 고집을 내세우면 그게 그렇게 못내 서운했다. 나는 이렇게 손을 내미는데 당신은 왜 그러죠? 하는 생각에 답답하기도 하고. 내가 풀렸다고 해서 상대도 풀려야 하는 게 아닌데도 그랬다. 하지만 사람이란 무릇 계속 누군가 다가오면 만만하게 보여 쉽게 밀어내듯, 그런 순간엔 내가 그 만만한 존재가 되는 법. 상대가 그렇게 끝까지 고집을 세우면 나는 답답해서 자꾸 다가가고, 상대는 나를 밀어내고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이건 나의 생각이자 나의 기록, 어쩌면 그쪽도 나 못지않게 답답했을지 모른다.


나도 물론 내 고집만 세우던 때도 있었다. 어릴 적 어떤 착한 아이에게.

그 아이는 너무 착해서 언제나 내 의견을 중요하게 생각해 주었고, 나를 좋아해 주었고 늘 친절했다. 

그런 선한 모습이 어린 나에게는 그저 쉬운 상대로 보였나 보다. 쉽게 화를 내지 않고 상대의 생각을 먼저 해주는 그 친구는 나에게 1순위가 아니었다. 언제나 내 곁에 있으니까.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그 친구와의 관계는 걱정할 일이 없으니까. 그러다 보니 사랑받는 자의 배부름이 자만심이라는 것으로 잘못 커졌나 보다. 평소와 다름없이 나에게 잘해주고 다가와준 그 아이에게, 늘 푸른 소나무처럼 한결같은 그 친구에게 결국 난 상처를 줬다. 별 거 아닌 일로 내 멋대로 굴었다. 제발 좀 친한 척 다가오지 말라고까지 했다. 어린 마음속 가장 못된 성격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쉬운 상대에게 강하게 구는 게 나의 본능이었을까? 아니면 모든 인간의 본성인데 다듬어지지 못한 시절 숨기지 못하고 삐죽, 튀어나와 버린 걸까? 결국 나중에 그 친구와 정말로 멀어지고 난 후, 뒤늦은 사과와 함께 이젠 그러지 말아야겠다 깊은 다짐을 했던 것까지 기억이 난다. 이미 서로에게 상처란 상처는 다 주고 난 뒤에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후회되는 기억이고 이젠 풀고 싶어도 풀 수 없는 숙제다. 그때 내가 어른이었다면 그러진 않았을 텐데.


© 픽사베이




이런 어릴 적 경험들은 여러 입장으로 서 볼 수 있는 기회였고, 장르는 다르겠지만 누구나 유년시절 기억의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을 법한 일들일 거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은 어떨까.

과거의 그 경험들이 이어져 한 해 한 해 시간이 흘렀을 뿐,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이다. 어릴 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 어느 시점에 정확히 선을 그을 수도 없는 것이고. 순간순간의 모든 경험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니.

사건과 변화가 켜켜이 얹히며 지금의 내가 되었지만 달라진 건 없다. 내가 내가 된 것이니. 다만 그때의 날 것 같던 감정들은 모난 돌이 정을 맞은 듯 조금씩 둥글어졌고. 이젠 그런 감정을 숨길 줄도 알고, 또는 정말 바뀌게 된 부분들도 생겼다. 지금은 날 아껴주는 선하고 친절한 자들이 너무나도 좋으니. 날 좋아하는 사람에게 제멋대로 굴던 어린 내 모습은 적어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때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그 소중함을 배운 거겠지, 그것이 나에겐 커다란 쇠망치 었던 게지'라고 생각한다.


평화주의자면서 동시에 착한 친구에겐 함부로 하기도 하던 모순덩어리 어린 시절의 나.

이 모든 걸 기억하는 지금의 나는, 겉면은 매끄럽게 잘 만들어졌지만 유약이 발리지 않은 속은 아직 거칠기만 한 도자기 같은 존재다. 심지어 작은 충격에도 와장창 깨지기 쉬운.

늘 억울하고 약자였던 것만은 아니기에 더 그렇다. 그저 순한 탈을 쓰고 있는 어른의 내 모습 안에 친구에게 상처 주고 후회했던 기억, 반대로 내가 힘들었을 때의 기억까지 모두 갖고 있기에. 

티브이나 유튜브 속 전문가들도, 사람은 어릴 때 풀지 못한 일들을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이어간다는 말을 많이 한다. 육아를 할 때나, 부부생활, 또는 사회생활을 할 때 그 어떤 상황에서든. 그리고 성인의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깊숙한 곳에서부터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고, 결국은 그걸 치유하고 완전히 태워버린 후에야 현재의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평범한 우리가 그럴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과거의 나를 찾고, 문제 되는 사건을 찾아내 해결까지 하는 과정. 쉽지 않은 과정이다. 그래서 우린 그냥, 보통의 오늘을 살아내야 한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함께 가지고 가는 것. 그것이 인생인 것이다. 

자꾸 꺼내고 펼치고 풀어내려 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더 나를 과거에 매어 두고 힘겨워하는 게 아닐까?

그런 경험들을 반성하고, 용서하면서 더 나은 지금과 앞날을 위한 밑거름으로 써야겠다 다짐해 본다.

후회되면 반대로도 해보고, 괜한 치기로 내 마음대로 해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글이란 무엇일까. 이런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을, 두둥실 떠다니는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잡아내려 하얀 백지에 정성스레 올려두는 것. 하지만 때론 앞 뒤가 바뀌고, 잘못되거나 오래되어 변형된 조각을 집어 올 수도 있는 것. 다만 누군가를 향한 고백이나 반성문이 아니기에, 나의 이 작은 우주 안에서 맴도는 생각들을 마구잡이로 써내려 본다.

착한 척하는 글은 그만. 조금씩 더 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오늘처럼 이렇게.

자꾸만 과거가 내 발목을 붙잡는다면, 확 그냥 발로 차버리고 지금부터라도 잘하자. 사람은 변할 수 있고, 그게 바로 사람이니까.

파이팅!



© 넷플릭스 <더 글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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