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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갈 줄 아는 기술, 두 번째

(2) 퇴근을 했는데 왜 쉬지를 못해

그렇게 혼자 있을 시간 없는 남편을 걱정하던 내가 이젠 일을 한다. 일주일에 한두 번 나가서 하고 오던 짧은 촬영일만이 아니다. 이젠 그 일 더하기 반쪽자리 재택근무까지 하고 있는 어엿한 직장인이다.

만만하게 봤지만 생각보다 대단했고, 덕분에 일과 시간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찰해 보는 중이다. 집에서 뒹굴댈 땐 그렇게도 안 가던 시간이, 업무 중엔 잠깐 메일 몇 통 쓴 것 같은데 세네 시간이 훌쩍 지나 있고. 아이들 등교시키고 돌아서 일하다 보면 어느새 하교해서 배고프다며 달려오곤 한다. 시간은 왜 이리 상대적일까.


심지어 때 맞춰 재택근무 비중이 늘어버린 남편과 함께 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혼자 있는 시간이 귀하다. 예전엔 그 시간을 누리며 그렇지 못한 남편을 걱정하는 호사스러운 여자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부부란 자고로 아무리 편한 듯해도 서로 적당히 눈치를 봐줘야 가정의 평화가 유지되니, 함께 하는 동안엔 자꾸만 부지런해진다. 혼자 있었다면 식탁 위에 다리 하나 떡하니 올리고 대충 고추참치에 밥 비벼 먹고 와- 맛도 좋고 설거지 거리도 없네, 끝내준다 내 팔자를 외칠 내가, 남편이 있으면 "뭐 먹을까?" 하며 냉장고를 뒤지고 정성스레 메뉴를 고민한다. 물론 그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니 한 수 위다. 끼니에 대한 이야기를 뒷 글에서 또 하겠지만, 나보다 훨씬 더, 잘 챙겨준다. 이 사람은 대체 뭘까 싶다. (이러니 가끔 나에게 게으르다 잔소리하는 남자지 뭐)



뭘 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이 남자. 직접 반죽한 수제비와 맛탕에서 난 이미 졌다.


그럼 퇴근 후 나의 일상은? 반쪽 회사원이라 빠르면 두세 시경 퇴근을 한다. 눈치 주는 사람 아무도 없지만 퇴근 후 잠시라도 벌러덩 누워 쉴라 치면 괜스레 불편하다. 나는 반쪽이니까, 절반은 주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휴식을 방해한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앉은 것도 아닌 선 것도 아닌 시간이 잠시 흐르고 나면 그들이 온다. 진격의 초딩들. 이제 간식도 챙겨주고 밀린 빨래도 하고, 자잘이 쌓인 설거지도 해치운다.


다음은 아이들 숙제 봐주는 시간. 태권도를 늦은 타임에 가는 아이들을 위해 지금 아니면 봐줄 시간이 없다. 심지어 어떤 날은 정신 없어 봐주지도 않는다. 알아서 해라, 싸인만 해줄게. 이런 게 바로 자기 주도지, 암.

그 후 잠시 두 놈이 함께 학원에 갔다 오는 꿀 같은 한 시간이 주어진다. 하지만 이 때도 쉴 틈은 없다. 아이들이 귀가하면 딱 저녁 식사 시간이니까.


진두지휘를 잘하는 남편이 요리의 키를 잡더라도 나는 충실한 조수 역할을 시작한다. 각종 조미료와 야채들을 부르는 대로 꺼내 주고, 조리 중 나오는 잡다한 그릇들을 틈틈이 닦아둔다. 오늘의 셰프가 남편이라면 나는 좀 소파에 푹 기대앉아 쉴 법도 한데 어차피 홀로 제대로 쉬지 못할 거, 눈치껏 같이 하는 거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 나면, 바로 설거지까지 마무리한다. 그 후 아이들 씻기고, 숙제 좀 더 봐주고 책 한 권이라도 읽어주고 잔소리 좀 하다 보면 어느새 시계는 밤 10시쯤을 가리킨다. 이런 젠장. 또 이렇게 하루가 갔구나.

휴, 내 몸도 씻어야지, 사람은 왜 매일 더러워지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귀찮은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는다. 그나마 혼자 보낸 시간은 이때뿐이다.



돌쟁이 엄마였을 시절이 떠오른다. 아이가 기어 다니고, 막 일어서고.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던 그때 나의 유일한 소망은 혼자 있는 거였다. 하지만 수유하는 엄마였고, 여러 사정상 아이를 어디 맡기고 제대로 쉬기는 어려웠기에. 내가 개중에 가장 좋아한 순간은 바로 화장실에 가 있는 시간이었다.

사람은 정말 힘들 때 나에게 모질게 한 사람도 평생 잊지 못한다지만, 정말 잘해준 부분도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것 같다. 그때 내가 화장실에 가있는 동안에는, 내가 뭘 하든. 얼마나 있든 편하게 씻을 수 있도록 남편은 날 부르지 않았다. 아이가 울면 바로 화장실 간 부인도 재촉한다는 다른 신랑들 이야기에, 나의 남자 뒤에 후광이 비출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 남편도 장점이 꽤 많은 남자다.


그러니까, 나에겐 순간순간 홀로 있을 시간이 필요하고, 이야기하다 보니 난 이미 그렇게 살고 있긴 하다. 언제든 내가 원하는 시간에 편히 씻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신생아 엄마도 아닌 이제 어엿한 초등맘인데. 이젠 화장실 타임 말고도 조금씩의 내 시간을 갖아봐야겠다. 흡연가들이 주기적으로 나가 욕구를 채우듯, 나도 내 충전방식을 받아들이고 노력해야지. 이젠 애써 시간 내어 고독이라도 씹을 거다. 앞뒤 안 보고 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보면서. 적당히 쉬어갈 줄 아는 기술이 지금 겐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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