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몇 살로 가고 싶으세요?
단 한 번의 기회예요. 여러 번 반복할 수는 없어요.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에서는 그랬다고요? 어우 아니에요. 이건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이라고요. (그렇게 생각해 줘요 제발)
저는 초등학교 3학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수능을 잘 봐서 좋은 대학교에 가는 것부터 하고 싶지만, 똑같은 두뇌를 가지고 수능을 다시 본들 뭐 얼마나 더 잘 보겠어요? 이런 얘기를 하다가 남편에게 물어보니, 본인은 중학교 때로 가고 싶대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겠다는 거죠. 하지만 전 냅다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 그의 코 앞에서 가만히 흔들었어요.
"그건 불가능해. 초등학교 때부터 기초가 없으면 중학교에서 수학을 절대 잘할 수가 없어."
남편은 수학에 대한 걱정 같은 건 안 하고 말한 눈치였지만 저는 달랐어요. 제 성적을 좌우한 건 수학이었거든요. 초등 수학이 중등에서 반복되고, 고등에서 정점을 찍는다는 건 어른이 되어서나 그 흐름을 눈치챘어요. 그저 수학이 너무 싫어서, 숲 같은 건 보기도 싫고 그때그때 나무만 들여다 보기에도 바빴거든요. 그마저도 대-충. 어쨌든 저는 그러한 이유로, 초3으로 돌아가 곱셈 나눗셈 기초부터 성실하게 빼곡하게 온몸에 새길 거예요. 그리고 그것도 알잖아요, 수학 실력이 과학으로도 연결된다는 거...
초3으로 가고 싶은 이유는 또 있어요. 저는 안양에 살다가 초등학교 2학년 기말고사를 보자마자 서울로 전학을 왔어요. 유치원부터 초등 2학년까지 한 아파트에 살며 수많은 동네 친구를 자연스레 사귀며 순수하지만 자연스럽고 당당한 삶을 살던 아이였죠. 저학년부터 학급 임원이 있던 시절이라 뭣도 모르는 저는 부반장이라는 직책도 꿰찼고, 쉬는 시간 숨바꼭질을 하다가 담임 선생님 캐비닛에 숨을 정도로 말괄량이에 활달한 아이 었어요. 음 아마... 선생님이 많이 착하신 분이었나 봐요.
똑같은 교과과정이었지만 거기선 공부도 자신 있게 잘했어요. 교실 안에 난로가 있던 그 학교의 겨울은 무지하게 추웠는데요, 등교하자마자 꽁꽁 언 손으로 받아쓰기를 하고 틀린 개수대로 손바닥을 맞기도 했어요. 무려 1학년 때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공포스럽죠. 하지만 그런 공포가 저를 공부하게 했어요. 뭐, 어렸으니까요. 그래서 받아쓰기도 늘 100점이었다는 말이에요. (그래요, 이 말하려고 이렇게 늘려서 썼어요.)
중요한 건 전학을 오고 난 후예요. 이상하게 낯선 새로운 학교, 은근한 무시 속에 학기말의 잘 다듬어진 학급에 억지로 끼워 넣어졌어요. 마치 1년 동안 동글동글 겨우 잘 다듬은 예쁜 찰흙 공에 작고 모난 돌이 하나 딱 붙어 버린 느낌이랄까요. 담임 선생님은 저를 보며 시골에서(안양은 도시인데 말이죠!) 왔으니 시험을 다시 봐라, 진도도 안 맞는다, 준비물은 그런 거 말고 이런 걸 챙겨라 등 약간의 무시하는 듯한 느낌을 주셨어요. 제가 둘째라서 눈치가 좀 빠르거든요.
남은 2학년은 없는 듯 지내는 게 낫겠다,라는 판단 아래 재미없는 날들을 지나 보내고 드디어 3학년이 되었어요. 새로운 담임 선생님은 처음 보는 분이 아니었어요. 저보다 두 살 많은 언니의 작년 담임 선생님이었죠. 그러니까 전학 오자마자 만났던 선생님이요. 그분은 보통이 아니셨어요. 전형적인 '촌지 선생님' 이셨죠. 선생님들 말로 '순박한 학교'에서 전학 온 우리 가족은 아무것도 모를 때였어요. 저와 달리 공부도 잘하고 이전 학교에서도 내리 반장이던 언니를 견제한 그 선생님은, 무언가를 '바라기' 시작하셨어요. 하지만 그 '바라는' 마음은 언니를 통해 엄마에게 전달되기가 쉽지 않았고(11살 아이가 뭘 알겠어요) 결국 선생님은 언니를 괴롭히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별 일 아닌 일로 혼내고, 무안 주고, 급기야는 미술 시간에 무언가로 또 타박을 하다가 먹물을 언니 옷에 쏟아버리기까지 하셨죠. 그건 그 선생님도 많이 놀라셨겠죠? 설마 일부러 쏟은 건 아니실 테니까요. 언니에게 조금씩 조금씩 학교 이야기를 전달받던 엄마는 그 일로 한계치에 다다랐고, 결국 학교에 찾아갔어요. 요즘 같으면 큰일이었을텐데, 그땐 참..
그날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는 몰라요. 다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니까요. 어쨌든 엄마가 다녀가신 이후로 언니의 학교 생활은 너무나 편안해졌어요. 사실 모범생에 인기도 많은 언니가 예쁨 받지 않을 이유는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선생님이 다음 해 저의 선생님이 되었다니.... 만약 엄마가 그때 그 선생님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저의 3학년 생활은, 무사했을까요? 언니의 고통과 엄마의 스트레스가 저에게는 의도치 않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니, 괜히 미안해 지기도 해요.
어찌 되었든 저는 그렇게 3학년 선생님을 잘(?) 만나서 나름의 예쁨을 받았어요. 당시에는 아무것도 몰랐던 저는 호랑이 같은 선생님이 저를 딱히 힘들게 하는 일이 없으니 안심하고 학교를 다녔지요. 하지만 공부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으니,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기초를 쌓아 열심히 하고 싶... 네요.
하필 3학년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가 그 선생님이 좋아서는 아니에요. 선생님은 저에게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전학으로 인해 한번 소심해진 몸과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거든요. 당차던 성격은 숨어버리고 소심하고 눈치 보는 아이가 되어 버렸어요. 그즈음 제 마음도 모르고 긴 머리를 숏컷으로 잘라준 엄마 덕분에 등교하자마자 교실 문을 열고 으앙 울어버리기도 했으니까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러지 말라고. 위축되지 말고 예전처럼 밝게 그 나이를 즐기며 성장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진짜 나를 찾아보라고요. 물론, 공부도 열심히 하고요. 그때 못 잡으면 계속 힘들다, 꼭 말해주고 싶네요. 그때는 뭘 해도 예쁘고 말 해도 좋을 때라고. 인생의 기초를 잘 쌓아보자고 말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