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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영 Oct 26. 2022

계획하는 대로

하와이 3

  대학교를 입학해서부터 내 인생은 그 전과 많이 달라졌다. 그전까지는 분명한 인생 계획이 없었는데 대학교를 진학하면서부터는 내가 원하는 것과 취향들이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진학한 패션과의 개성 강한 특성 때문인지, 개성이라는 보호막 안에서 성격이 과감해졌고 대학생활이 세상의 전부로 느껴지면서 내 개성을 마음껏 발휘해보기로 작정했던 거 같다. 내가 원하고 움직이면 그대로 다 될 거 같은 무모함이 생겼고, 실제로 많은 것들이 내 뜻대로 됐다. 듣고 싶은 수업들은 분명했고 수강신청을 실패한 적이 없다. 친해지고 싶은 선배들은 내 마음이 전해지기라도 한 듯 친해졌고, 다른 과에 알고 싶은 친구들도 다 우연 또는 자연스러운 일들로 친해졌고 기대 이상으로 인맥이 넓어졌다. 학생회를 들어가야겠다 생각했더니 동기들의 추천으로 들어가게 됐고, 교내에서 관심 가는 이성이랑도 가까워진다던가, 모든 건 내 계획대로 됐다.


  대학생활에 완전히 빠져서 즐겁게 다니다 보니 내가 나아가고 싶은 방향도 쉽게 정할 수 있었다. 여성복보다는 남성복이 더 좋아서 남성복 동아리 활동을 따로 했었고, 그리는 것보다는 쓰는 게 더 자신 있어서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수업이 아니라 패션 기사를 쓰는 패션미디어 수업을 들었었다. 내 취향과 적성은 확고하게 드러났고 그렇게 난 디자인이 아닌 패션 매거진으로 진로를 정했다. 든든하고 내가 많이 따랐던 선배는 나의 관심사를 알고 패션매체에 있는 또 다른 선배를 소개해줘 패션 뉴스를 다루는 어시스턴트 일도 경험하게 해 줬다. 그 기회로 난 더 분명해졌고 향후 20년의 내 인생 계획까지 세울 수 있었다. 캐주얼한 스트릿 패션 매거진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경험과 경력을 쌓은 후 하이패션 매거진 에디터가 돼야지 계획했었는데, 고단했을 중간 과정 생략하고 바로 하이패션 매거진이라니,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투톱을 다루는 곳 중 한 곳으로.


  취직 후에 컴퓨터 정리하다가, 대학 때 사진과 전공 수업을 교양수업으로 대신 들었었는데, 그 수업 때 자료들을 보게 됐다. 한 번은 5년 후의 내 모습을 표현하는 사진을 찍어오는 과제가 있었는데 난 2015년 파리 컬렉션을 다루는 기사를 쓰고 있는 내 뒷모습 사진을 찍어갔었다. 사진 속 벽면에는 내가 다니고 있던 A사 매거진의 표지가 여러 장 붙여져 있었다. 난 A사와 B사 중 한 곳이면 된다는 생각이었지 특정 한 곳을 원했던 건 아닌데, 실제로 난 A사 매거진에서 2015년 파리 컬렉션 자료를 모으고 있었고 어찌 보면 이것 또한 내 계획대로 된 샘이라 신기했다.


  화보 촬영 몇 번 하고 인터뷰 녹취 몇 번 하면서 금세 매거진 세계는 파악하게 됐지만, 하이패션의 세계는 내가 너무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패션 브랜드를 넘어서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들을 상대하는 매거진이었다. 갓 졸업하고 나와서 명품에 대해 알면 뭘 얼마나 알았을까. 로고로 브랜드를 알아보고, 관심 있는 브랜드는 디렉터가 누군지까지는 알았겠지만 그게 끝이었다. 이런 이해가 부족할 걸 알고 스트릿 패션 매거진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는데, 스트릿 패션 매거진부터 들어가서 기초 같은 걸 다지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을, ‘차근차근’이 필요하다고 무의식에 알고 있던 거다.


  패션 하우스의 역사와 뜻이 담긴 고가의 제품들을 다루는 일은 보통이 아니었다. 단순히 의류가 아닌 예술작품으로 인식하면 된다. 하지만 일보다 힘들었던 건 정신적인 문제였다. 사무실의 분위기는 패션팀 부장 선배의 존재 여부에 달려있었을 정도로 예민한 분이셨다. 그 사무실에 있는 모든 분들, 편집장님도 그걸 알고 계셨다. 그 탓에 부장 선배가 외근 간 날이면 그나마 숨 쉬는 거 같았다. 적응하나 싶다가도 회의감도 들고, 또 괜찮아지는가 싶다가 또 너무 고되고. 반년이 지나가면서부터가 제일 힘들었다. 세계 4대 패션위크가 끝나고 일 년 중 제일 두꺼운 호를 다룰 때는 몸이 4개여도 부족한데 실수 하나 용납되지 않았다. 숨 막히는 사무실에 있다가 외근 나가는 게 좋던 것도 그때는 사무실에 쌓여있는 일이 걱정되기만 했다. 외근 나가서 이동 중에 항상 하던 생각은 ‘교통사고 났으면 좋겠다’였다. 그만두고 싶은 건 아닌데 너무 고되고 쉬고는 싶으니 고작 생각한다는 게 교통사고였다. 내가 믿는 신념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은 무너진 지 오래됐는데도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다. 이런 제정신 아닌 생각을 한 두 달 동안 서스름 없이 했던 거 같다. 그러면서 그 폭풍 같은 시간은 교통사고 없이 지나갔고 다시 일은 할만했다. 가장 두꺼운 호를 끝내고 몇 달이 지나면 한여름의 제일 얇은 호가 기다리고 있다. 그 호는 제일 친한 선배랑 파트너를 하게 되면서 조금의 여유와 안정을 되찾고 일하고 있던 어느 날. 오랜만에 온종일 집에서 쉬고 있던 토요일 어느 날 밤, 할아버지는 말도 안 되는 끔찍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내 생각은 딴 곳에서 실제로 일어났고 난 그 달을 마지막으로 패션 매거진 일을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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