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4
잡지사에 첫 출근했을 때의 그 기분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회사 건물을 들어서는 순간 얼마나 벅차던지. 떨리고 긴장됐지만 그 건물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너무 뿌듯했다. 매거진이라는 매체는 누구보다 미리 트렌드를 파악하고 추려서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패션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적인 소식을 먼저 접하는 게 너무 좋았고, 그렇게 약 두 달을 미리 사는 일은 짜릿했다. 매달 잡지 마감일은 항상 같은 날짜로 정해져 있어서 아무리 미리 준비한다고 해도 마감쯤에 하는 야근과 불규칙적인 출근은 생활패턴도 엉망으로 만들고 피로도 쉽게 쌓이게 했지만 마감이 끝나고 며칠 쉬고 다시 출근할 때면 또다시 설레는 게 매거진 일이었다. 출근해서 모두가 몇 날 며칠을 밤새서 나온 잡지를 볼 때면 내가 왜 이 일을 사랑하는지 다시 깨닫곤 했다.
모두가 나에게 이 일이 천직이라고 했다. 새로운 것을 접하는 거에 희열을 느꼈고 새로운 사람 만나는 걸 좋아했고 그 사람들의 색다른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건 흥미로웠다. 첫 번째 장래희망은 에디터, 두 번째는 파티걸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할 정도로 사교적인 모임도 좋아했던 나였기에 패션계의 모든 행사장을 가게 되는 특권은 나에게 엄청난 메리트가 있었다. 동기들을 만나면서 내가 그렇게 당당한 때도 없던 거 같다. 매거진 쪽에 관심 있는 동기는 없었지만 패션 매거진계의 대기업이라는 표현을 써야 할 거 같은 그곳에 소속돼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장난으로 에디터님이라 불러도 난 그 말 듣는 게 그렇게 좋았다. 난 이제 이곳에서 몇 년이고 몸 바쳐 일해서 트렌디하고 품격 있게 자신을 꾸밀 줄 아는 멋있고 날씬한 에디터가 되는 일만 남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겉에서 보이는 것과 속사정은 많이 달랐다. 패션 매거진을 얘기하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떠올리게 된다. 나도 그래서 많이 받았던 질문이, 영화랑 똑같냐고. 영화보다 더 했다. 촬영 하나 끝내면 또 다른 촬영이 기다리고 있었고, 한 제품을 놓고 촬영을 위해 다른 매거진 촬영에서 받고 또 보내주고, 핸드폰이 꺼지는 순간 비상사태가 벌어지는 나날이었다. 촬영이 끝나면 사무실로 돌아가 시즌에 맞는 사진을 1000장씩 스크랩해야 했고 뒤이어 그걸 넘기고 나면 디자이너 인터뷰 녹취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주도를 당일치기로 4일 연속 출퇴근해야 하는 일정도 소화해야 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매끄럽고 적당히 마블링이 돼 있는 동그란, 주먹만 한 돌을 구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 돌을 구하러 온갖 꽃시장을 다 다녔었는데, 그 돌들은 무섭게 생긴 보디가드 같은 분들이 촬영장에 모셔온 고가의 시계를 살포시 올려놓고 촬영하는데 쓰였다. 하지만 이런 게 문제가 아니다. 낮밤, 주중 주말 경계 없이 일하는 건 익히 들어서 각오하고 있던 거라 새벽 4시에 퇴근하고 오전 8시에 출근하는 거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하이패션 매거진이면 패션계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쥐고 있겠나. 특히 국내 브랜드에 한해서는 그 힘은 최고였다. 에디터들의 평가로 이루어진 매거진의 말이 곧 진리라는 느낌으로 사람들은 받아들이니까. 그중에서도 최고 힘을 쥐고 있던 부장 선배의 힘은 대단했다. 부장 선배의 존재는 입사 전부터 알고 있을 정도로 이쪽 계열에서는 유명한 분이셨다. 각 팀 부장님들 중에서 제일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인맥을 자랑하며 항상 제일 이슈인 스타와 화보 촬영을 진행하는 능력 있고 깡마른 매력적인 분이셨다. 사무실, 촬영장, 그 어디가 상관없이 모두가 그녀에게 맞추느라고 나이의 위아래는 없었다. 원하는 상품을 협찬받을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는 건데, 그녀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잡지에서 촬영을 먼저 잡았든 말든 상관없이 우리가 부르는 날짜에 물건이 안 오면 큰일 나는 거였다. 협찬을 못 받으면 그 브랜드의 촬영본들을 다음 달에서 다 빼버리겠다고 하는데,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할 힘이 있었고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촬영만 몇 번이다. 그런 상황들을 겪으며 일하면 할수록 그 위치는 그만큼의 욕심을 바탕으로 옆사람을 밟고 올라서서 이루어진 위치라고 느꼈다. 매거진 입사하기 직전에만 해도 ‘누구 밑에서 일을 해야 한다면 이런 분 밑에서 배우고 일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를 존경하면서 일했던 날들이 그리웠다. 물론 모든 에디터 선배들이 그랬던 건 절대 아니다.
그런 힘 있는 매거진이라 명령을 받고 일하는 막내 입장에서는 편할 때도 많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남에게 피해 주면서 내 이득을 취해야 하나 하는 의문은 자주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잘못됐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흡수력은 더 빠른지. 반년이 넘어가니 내 성격도 많이 변했다. 난 이전보다 더 급하고 날카롭고 무례해졌다. 시간은 항상 부족했기에 모든 물건을 퀵으로 주고받았는데 그 퀵 하시는 분들은 대부분이 나이 지극하신 분들이다. 가끔은 허리가 다 구부러진 꼬부랑 할아버지 분들이 그 무거운 쇼핑백을 짊어지고 오시기도 한다. 하지만 어른에 대한 예의는 상실한 지 오래, 물건 받으면서 인사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전화로 빨리 오시라고 다그치는 게 일상이다. 괜히 일 잘못 꼬여서 작은 흠 잡히는 게 두려워서 나까지 언젠가부터 말도 안 되는 갑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물건을 직접 들고 움직일 때도 많다. 그 세계에서는 명품의 안전이 우선, 명품의 안녕이 우선이다. 밥 먹을 시간은 당연히 없고 모든 순간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에디터들이 대부분 날씬한 이유는 딴 데 있는 게 아니다.
안 그래도 급하고 여유롭지 못한 내 성격은 날이 갈수록 예민해졌고, 내가 중요시했던 것들과 지키려던 가치들은 무너져갔다. 그런 나를 볼 때마다 그토록 원하던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이건 아니라는 생각은 했지만 나에게 이 매거진을 나가는 건 너무 곤욕이었다. 정신이 무너지면서 몸도 망가져갔다. 몸이 망가져 가는 걸 느끼면서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러다가 아프면 잠시 쉴 수 있겠지, 그건 내가 그만두고 싶어서 그만두는 상황이 아니니까 괜찮다고 합리화시켰다. 무너지다 못해 정신도 망가져버렸다.
아프지 않으면 작은 사고라도 나길 바랬던 나는 결국 할아버지의 교통사고를 맞이하게 된 거다. 그때 아이러니하게도 정신을 차렸던 걸까. 할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 너무 큰 시련이었고, 일주일 만에 회복할 수 없었다. 그 상태로 일을 하려니 막막했다. 작은 실수조차 하기 싫은데 그럴 자신은 없었고, 지금 그만두지 않으면 지금보다 괜찮은 사람이었던 이전의 나를 되찾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닫게 됐다. 무언가가 잘못되가고 있다고 느꼈다면 벗어날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주위 환경이 어떻든 나 자신의 중심을 지키면서 일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난 아직 미성숙하다는 걸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 물론 할아버지의 사고가 나 때문이 아닌 거 안다. 난 목적지만 있고 가는 방법도 모르고 길도 잃은 자동차나 마찬가지였고, 꿈이라는 구속 속에서 역주행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직진하고 있던 샘이다. 그런 날 멈춰 세우신 건 할아버지셨다. 난 할아버지 덕분에 멈출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