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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영 Oct 22. 2022

흘러가는 대로

하와이 2

  서핑을 처음 시작했던 건 대학교 4학년을 코스모스로 마친 여름 방학 때였다. 그때 한참 우리나라도 서핑이 스포츠로 인기가 생기기 시작할 때였던 거 같다. 그 전 해 여름, 저녁으로 멕시칸 음식을 먹은 후 시원한 커피를 마시러 갔을 때였다. 시원한 헤이즐넛 아메리카노를 한잔씩 하며 ‘나는 이런 사람이야’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엇에 관심이 있고, 관심 있는 걸 어떻게 시작하게 됐고, 앞으로는 또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나름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인사하고 지낸지는 일 년이 되어가고, 몇 개월 동안 끼니를 수십 번이나 함께 한 사람이었으나 난 그 사람을 그제야 아는 거 같았다. 깊이 있는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나도 나의 깊은 내면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현재 내 전공이나 졸업 후 진로가 아닌, 진짜로 내가 좋아하는 거. 내가 언젠가 꼭 하고 싶은 거. “난 책을 쓸 거야” 그리고 “서핑을 배울 거야”. 누군가에게 말할 생각이 생전 없던 마음속 꿈이었는데, 그날 그에게 처음으로 말했다. 그렇게 입 밖으로 내뱉은 말에는 생명이 불어넣어 지듯 용기가 생겼다. 그날 이후 서핑을 꼭 배우리다 다짐을 했고 1년 후, 대학교 모든 학기를 마치고 부산으로 내려가 첫 강습을 받았다.


  2014년 7월 12일. 굳이 기념해야 할 중요한 날은 아니지만 원래 날짜와 생일(내 생일은 물론 남의 생일도)에 약간 집착하는 스타일이라. 무엇보다도 날짜를 기억하며 1년 차, 2년 차, 그 후로도 쭉쭉 날을 이어나갈 생각을 하니 신나더라. 서핑을 시작한 동시에 흥미를 붙였다. 어렸을 때 수영을 배워서 기본적으로 물에 대한 공포가 없었고, 겨울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빠 덕분에 가족여행으로 스키장도 자주 가서 그때 스노보드를 배워서일까. 서핑은 생각보다 쉽게 배울 수 있었다. 그 해 여름은 거의 주말마다 부산 가서 서핑하며 시간을 보냈다. 반년만 나만의 시간을 가지며 충분한 고민과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은 후 취업 준비하겠다고 부모님께 허락받고 9월의 늦여름 끝자락까지 서핑을 즐겼다.


  그렇게 부산을 오가던 중에 그 당시 이슈였던 한 패션 브랜드에서 팝업스토어에 함께할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었다. 팝업스토어는 부산에서 진행하는 거였고 그 아르바이트 자리는 부산에 사는 친구에게 제안이 들어왔는데 상황이 안 됐던 친구가 자기 대신 나를 추천한 것이다. 나도 평소에 관심 있던 브랜드라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고 그렇게 보름 동안 부산에서 지내면서 일을 하게 됐다. 연결고리라고는 아르바이트뿐인 새로운 사람들과 일을 하다 보면 마찰이 생길 수도 있는데 인복이 있는 건지, 다 밝고 일 잘하는 좋은 사람들이어서 즐거움만 있었다. 매일 우리와 같이 출근하고, 우리를 알아가는 게 우리만큼 즐거워 보였던 대표님께는 시간이 지날수록 존경심이 커졌다. 좋은 마음으로 일하니 스스로 최선으로 일하게 됐고, 대표님은 그런 태도를 좋게 봐주신 건지 부산 끝나고 이어서 서울에서 진행하는 팝업스토어서도 같이 일하기를 제안하셨다. 누군가의 밑에서 일을 해야만 한다면 이런 분 밑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걸 느끼고 배우게 하는 대표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어 일을 예정보다 더 길게 하게 됐다. 10월 한 달을 그렇게 보내면서 자연스레 커진 아르바이트 금액. 계획에 없던 꿀알바 덕에 11월에는 과감하게 발리로 서핑 트립 갈 야무진 계획을 세웠었다.


  팝업스토어 진행 중에 회식을 하게 됐는데, 대표님은 이번에는 팝업 행사가 모두 끝난 후 브랜드로 들어와서 일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셨다. 자유롭지만 중심이 분명하고 당당한 모습에서 배울게 많다고 느껴지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난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당황하신 듯했으나 사실 황당하셨을 거 같다. 나는 패션 브랜드가 아닌 패션 매거진 쪽에서 일하고 싶다고 뚜렷하게 말씀드렸다. 나는 그 당시 하고 싶은 게 특별히 없어서 진로가 고민된다는 걸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무엇이 하고 싶은지 알았고, 오히려 문제라면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단번에 제안을 거절하는 게 의아한 것도 잠시, 나의 뚜렷한 이유를 들으시고는 매거진 중에서도 어느 쪽에 흥미를 갖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주시더니 어느 하이패션 매거진에서 조만간 공문을 올릴 거 같다고, 그때 꼭 지원하라고 하셨다. 그 후 팝업스토어 행사가 끝나갈 때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최고로 꼽는 그 패션 매거진에서 에디터를 구한다는 공문이 떴고, 이력서를 보냈다. 후에 매거진 측에서 연락이 와서 설마 되겠어하는 마음으로 면접까지 봤다. 면접 후에는 설마 전화가 왔고 일주일 쉬고 바로 그다음 주부터 출근하기 시작했다. 근사하게 계획돼있던 내 서핑 트립은 그렇게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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