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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영 Oct 30. 2022

Route 66

로스앤젤레스 5

  엘에이에서의 마지막 날, 비록 물놀이나 서핑은 못 즐기더라도 바닷가는 한 번 들려줘야지 않겠냐는 친구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친구들과 함께 산타 모니카 비치를 다녀왔다. 점심 전에 도착했을 때는 구름 낀 흐린 날씨로 전체적인 풍경은 회색빛이었으나 그 나름의 멋이 있었다. 항구 앞에 몇 개의 놀이기구와 게임센터들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놀이공원은 회색 배경 안에서 더 알록달록 빛을 발했다. 바닷가 앞에 넓게 펼쳐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항구 끝으로 향하기 위에 항구 길을 올라섰다. 그 길에는 편하게 산책 나온 듯한 사람들도 있었고 기타를 갖고 나와 버스킹 하는 사람들도 몇 있었고 관광객들도 많았다. 바다를 향해 있는 길을 걷다 보니 66번 국도를 표시하는 팻말이 정중앙에 세워져 있었다. 가까이 갔을 때 다시 보니 그 팻말은 66번 국도가 끝나는 지점을 알리는 표시였다. 시카고 미술관 앞에서 시작하는 66번 국도의 종점은 바로 여기, 산타모니카 피어였다.


  시카고에서 산타모니카까지 뻗은 66번 국도는 3,500 킬로미터로 미국 최초의 대륙 횡단이다. 이런 수치에 약한 나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가 440 킬로미터인 것을 떠올려본다. 하지만 66번 국도는 미국인들에게 이런 역사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당연히 도로 상태가 좋지 않을뿐더러, 평야를 지나가다가 강도 건너고 어느 순간에는 꼬불꼬불한 산악지대도 넘어가야 한다. 사막과 협곡을 수없이 지나가는 길을 거듭하면서 이동해야 하는 길이다.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그중에서도 미국 동부와 중부 사람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서로 많이 이동했다. 그렇게 꿈을 안고 이주해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캘리포니아는 미국인의 꿈과 자유를 상징하게 되었다.


  거창하게 말하면 모험이라 할 수 있지만, 나는 사서 고생하는 걸 즐기는 편이다. 물론 66번 국도로 하는 미국 횡단 여행은 그런 내가 희망하는 ‘사서 고생하는 여행’ 중에 하나다. 하지만 여자 혼자서는 위험해 불가능한, 혼자가 아니더라도 여자들끼리는 너무나도 위험한 여행이기에 아직까지는 희망일 뿐이다. 누군가와 같이 보다는 혼자 한 여행이 더 많은 나는 그 여행을 함께할 사람부터 찾아야 했고, 비포장도로로 이루어진 데다가 한참 돌아서 가는 그런 고생스러운 여행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내 친한 사람들 중에 몇이나 있을까 싶다. 그렇게 고되고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아무나랑도 할 수 없는 여행이지 않나. 이 여행에 적합한 친구를 찾는 것부터가 나에겐 하나의 관문이었다.


  그런 하나의 꿈인 66번 국도의 종점 팻말을 보니, 패션잡지 다녔을 때 어느 인터뷰 녹취한 내용이 생각났다. 마감 기간이라 계속 반복되는 야근에 피로가 축척되고 집중도도 떨어져 갈 때, 남아공으로 여행을 다녀온 톱모델의 인터뷰 녹취를 하게 되었다. 어떻게 아프리카를 가게 됐느냐는 질문으로 내용은 시작되었다. 화보 촬영 차 몇 번 간 이력이 있지만 그녀가 처음 진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영화였다. 멀고 위험하기도 해서 혼자 갈 엄두가 안 났었는데 봉사 갔을 때 알게 된 NGO 활동하는 분들과 결국 가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지하수 뚫는 작업 중에 물줄기가 터지는 경험을 두 번이나 하게 되었는데, 물이 귀하디 귀한 곳에서 물줄기가 터지는 걸 보고서 그녀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고 한다. 마음의 방이 더 늘어난 느낌, 여유가 생겼다고 표현을 하며, 결혼관에 대해서도 닫혀 있던 마음도 좀 열리는 계기가 됐다고. ‘누군가와 함께 평생을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라는 불신이 있었는데 결국 탄자니아에서 남아공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닫혀있던 그 마음의 문이 열렸다고 한다. 어떤 영상의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에서 그녀는 이런 문구를 보았다.

  “Do you want to go fast? Go alone. Do you want to go far? Go together.”


   후에 알고 보니 그 메시지는 아프리카의 유명한 속담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탄자니아도 혼자였으면 못 왔겠지, 이들이 나와 함께 동행해줘서 갈 수 있었구나’ 깨달았다. ‘앞날은 모르지만 혼자서 멀리 가기는 쉽지 않겠다, 함께 가면 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자신감이 생기면서 평생 함께 멀리 갈 수 있는 사람이랑은 결혼할 수 있겠다는 도달점에 이르렀다며 그녀는 여행 얘기를 마무리했다.


  내가 66번 국도 횡단 여행을 미래의 배우자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그녀가 말했던 결혼관에 많이 동감하는 결혼관을 갖고 있는 나지만, 결혼이 아니라 이상하게 66번 국도를 떠올리면 이 인터뷰 내용이 함께 떠올랐다. 멀리 가려거든 함께 가라. 난 멀리 가는 것보다 함께 가야 하는 여행이라는 포인트가 더 중요하다. 종점 팻말을 보며 언젠가는 이룰 수 있는 아메리칸드림이겠지 생각했다.


  그 톱모델의 인터뷰 마지막 중에, 결혼관이 그렇게 바뀌었으면 곧 좋은 소식 기대해도 되겠냐는 질문에 그녀는 의미심장한 대답을 남겨서 재미있게 녹취 작업을 마쳤던 기억이 난다. 몇 달 후 그녀는 결혼 발표를 하였고, 지금은 패션계를 대표하는 워너비 부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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