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는 말 대신, 아동용 이터널 션샤인
제목 : 그림자를 삼킨 소년
지평선 너머로 해가 지지 않는 그림자 없는 마을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너무 밝아 아무도 서로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눈을 감은 채 서로의 안부만을 주고받았습니다. 소년은 그 눈부신 침묵이 무서웠습니다. 모두가 눈을 감고 걷는 이 마을에서, 자신이 침묵하거나 빛나지 않으면 영영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한 채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그 눈부신 마을에서 등불을 든 한 소녀를 만났습니다. 소녀는 마을의 어떤 빛보다도 맑고 선명했습니다. 소년이 처음으로 눈을 뜨고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새벽하늘처럼 청초했고, 그녀가 든 등불은 소년의 심장 밑바닥까지 따뜻하게 비추었습니다. 소년은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이토록 간절히 지키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그녀와 함께라면 이 영원한 낮도 외롭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소년은 그녀의 곁에 머물기 위해 부지런히 빛을 모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말들만 골라 주머니 가득 빛의 알을 채웠습니다. 소년은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한 것들을 그녀의 등불 속에 아낌없이 쏟아부으며 말했습니다.
“이 빛을 다 줄게. 그러면 우린 영원히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알 속에는 소년이 차마 버리지 못한 날카로운 가시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소녀가 아픈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너의 빛은 왜 이렇게 날카롭니? 네가 알을 보탤 때마다 내 등불이 너무 무거워.”
소녀가 아픈 목소리로 물었지만, 소년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소녀의 등불이 흔들릴수록 소년은 그녀가 영영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소년은 자신의 진심이 아직 부족한 탓이라 믿으며, 주머니 깊숙이 박혀있던 마지막 알들까지 긁어모아 소녀의 등불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아니야, 이건 더 좋은 빛이야. 이것만 있으면 넌 절대 어둠 속에 갇히지 않아.”
소년은 울먹이며 남은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억지로 욱여넣은 빛들은 감당할 수 없는 열기를 내뿜으며 날카로운 파편으로 부서졌습니다. 사방으로 튄 빛의 조각들은 소녀의 가녀린 손등을 깊게 할퀴었고, 그 상처 틈으로 스며든 빛은 소녀의 손을 시커멓게 태워버렸습니다. 소년이 사랑이라 믿었던 빛은 소녀에게 잔인한 낙인이 되었습니다.
결국 소녀는 상처 입고 타버린 손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비명 대신 깊은 침묵을 선택한 채, 소녀는 그대로 캄캄한 숲을 향해 떠났습니다. 소년이 건넨 가장 눈부신 진심들이, 소녀를 가장 깊은 어둠으로 내몰고 만 것입니다.
소녀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년은 참지 못하고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이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쏟아내자, 신기하게도 마을을 비추던 영원한 낮의 빛들이 하나둘 사그라들었습니다. 소년의 울음소리가 깊어질수록 하늘은 잉태하지 못한 눈물처럼 검게 물들었고, 빛에 가려 숨죽이고 있던 그림자들이 발밑에서 솟구쳐 올랐습니다. 마침내 온 세상이 지독한 어둠에 잠겼습니다.
소년은 태어나 처음 마주한 어둠 속에서 눈이 멀어버린 듯 허우적거렸습니다. 손을 뻗어도 잡히는 것은 차가운 공기뿐이었고, 평생을 비추던 빛이 사라진 자리는 칼날 같은 추위로 가득 찼습니다. 소년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고 넘어지며 소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비명보다 깊은 적막뿐이었습니다. 어둠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와 소년의 숨통을 조였고, 소년은 이제 자신이 영영 이 검은 구덩이 속에 매몰될 것이라는 공포에 몸을 떨었습니다.
길을 잃은 소년이 절망에 겨워 다시 바닥에 엎드려 숨을 헐떡였을 때였습니다. 울음이 잦아들고 심장 박동 소리만이 고요를 채우자, 사방을 짓누르던 적막 속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소년이 겨우 고개를 들자,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밤하늘의 별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습니다. 억겁의 시간 동안 눈부신 빛 뒤에 숨어있던 별들이 소년의 눈동자에 선명하게 박혔습니다. 소년은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빛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온전한 형태를 갖는다는 것을요.
소년은 밤하늘의 별을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발밑에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가 무거워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었습니다. 소년은 제자리에 앉아 자신의 그림자를 하나씩 씹어 삼켰습니다. 그림자를 삼킬 때마다 가시 돋친 기억들이 목을 찔렀지만 소년은 피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그림자까지 다 삼켜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순간, 별빛이 흐르는 끝자락에서 은빛 안개가 소용돌이치는 망각의 강이 나타났습니다.
강가에는 얼굴이 없는 사공이 낡은 배 한 척을 세워두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공의 몸은 강물처럼 투명했고,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안개가 흩어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사공이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스스로의 그림자를 삼키고 온 소년아, 너는 무엇을 잃고 이곳에 왔느냐?”
소년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빛이라 믿었던 가시들을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사공은 노를 천천히 저으며 강물을 가리켰습니다.
“이 강물에 몸을 담그면 너의 가시 돋친 기억들은 모두 은빛 물고기가 되어 떠날 것이다. 하지만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는 너의 이름도, 그녀의 향기도 남지 않을 터인데 그래도 건너겠느냐?”
소년은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공이 나지막이 덧붙였습니다.
“잊는다는 것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비워내는 용기란다. 이제 너의 과거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건네렴.”
소년은 강가에 서서 자신의 과거를 향해 마지막으로 외쳤습니다.
“미안해. 내 그림자를 빛이라 속여 네 등불에 던졌어. 이제는 누구도 찌르지 않는 나만의 별을 띄울게.”
소년은 강물에 몸을 담갔습니다. 낡은 기억들은 은빛 물고기가 되어 헤엄쳐 나갔고 무거운 죄책감은 나비가 되어 흩어졌습니다.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동안 소년의 가냘픈 어깨는 단단해졌고, 두려움에 떨던 눈매에는 깊고 고요한 밤의 빛이 깃들었습니다. 강을 건너 저편에 닿았을 때,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갓 피어난 안개처럼 맑고, 울창한 숲처럼 깊은 눈을 가진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한 여인을 마주쳤습니다. 그녀 또한 모든 아픔을 씻어낸 듯 맑은 눈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본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투명하고 단단한 온기를 느꼈습니다. 이제는 떨리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습니다.
“안녕하세요. 별이 참 아름답네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습니다. 여인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숲처럼 깊고 고요한 그의 눈동자 속에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바라보던 밤하늘의 별들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아주 오래전부터 이 문장을 기다려온 것 같은 낯익은 설렘이 여인의 가슴을 스쳤습니다.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러게요.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이름을 묻지도, 어디서 왔는지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여인은 홀린 듯 그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손을 잡는다면, 이 별빛 아래에서라면, 어쩐지 잃어버렸던 삶의 가장 소중한 조각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맞잡았습니다. 따스한 온기가 맞닿은 손바닥을 타고 심장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보며 나직이 속삭였습니다.
“이제는 길을 잃지 않을 거예요.”
두 사람이 마주 잡은 손 사이로 푸른 델피늄 한 송이가 피어올랐습니다. 그림자 없는 마을의 서툰 사랑은 강물에 씻겨 가고, 서로의 밤을 지켜줄 두 개의 별은 푸른 꽃향기 속에서 다시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