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쇼, 이승우의 사랑의 생애
연휴의 시작, 서울랜드는 활기로 가득 찼다. 연인보다 가족이 더 많았다. 이제 부모 나이가 된 우리는 부모들의 피로 섞인 얼굴을 보며 측은지심을 느꼈다. 무엇을 탈까, 설레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의 지루함을 달래는 시간이 더 길었다.
오랜만에 찾아간 놀이공원이었다. 무서운 걸 못 타는 연인을 위해 성인용 놀이기구보다는 아동용 놀이기구를 더 탄 것 같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누비며 평화로운 오전을 보내는 동안, 우리는 조금씩 지쳐갔다.
오후가 되자 좀 쉬고 싶어졌다. 우리는 그늘진 나무 밑 벤치를 찾아 앉았다. 졸음이 쏟아지던 나는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올려다본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살. 수면제를 섞은 듯한 그 눈부심에 깜빡 잠이 들었다. 문득 이 완벽한 평화가 영화 <트루먼 쇼>의 정교한 세트장처럼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승우는 『사랑의 생애』에서 그렇게 말했다. 타인이었던 우리가 서로의 우주로 침범해 들어와 가장 내밀한 비밀까지 공유하게 될 때, 사랑은 신비함을 잃고 일상이 된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그녀를 다 알면서도, 처음 보는 이방인처럼 낯설고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사랑은 그렇게 익숙한 사람을 매 순간 '모르는 사람'으로 재발견하며 경탄하는 주술인지도 모른다.
찰나의 단잠이었을까. 꿈속에서도 나는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있었다. 꿈의 깊은 층위에서도 나는 그녀가 보고 싶어 허우적대다 눈을 떴다. 시야가 번지며 들어온 풍경은 여전했다. 나는 여전히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있었고, 그녀는 나를 어여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잤어?"
그 순간 드는 생각.
'꿈인가?'
그 순간, 나는 혼란스러웠다. 지금 눈을 뜬 이 자리가 현실인가, 아니면 꿈속에서 꾼 꿈인가.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너무 투명해서, 오히려 현실 같지 않았다. 만약 이것이 트루먼의 세트장이라면, 나는 이 가짜 하늘 아래서 영원히 갇혀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제와 어렴풋이 느껴지는 건, 그날의 서울랜드도, 그녀의 어여쁜 시선도, 사실은 내가 가장 사랑했던 긴 꿈이었다는 것. 이별이 현실이고 사랑이 꿈인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사랑 자체가 나를 깨우지 않기 위해 세상이 공모한 거대한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세트장의 문을 열고 나간 트루먼처럼, 차가운 바깥공기를 마시며 서 있다. 뒤돌아본 그날의 벤치는 여전히 따사롭지만, 이제는 만질 수 없는 필름 속 장면일 뿐이다. 사랑했던 시간은 꿈만 같고, 이별은 깨어난 뒤의 지독한 숙취처럼 머리를 울린다.
꿈에서 깼는데, 왜 여전히 당신이 나를 어여쁘게 바라볼까. 왜 영영 그 시선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일까. 나는 아직도 그 벤치에서, 당신의 무릎 위에서 눈을 뜨지 못한 채 서성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