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소녀
어떤 이는 거대한 관념의 하늘을 유영하며 삶의 근원을 쫓는다. 손에 잡히지 않는 형이상학의 구름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문득 지상에서 고요히 빛나는 존재를 마주하게 된다. 그는 발을 땅에 딛고서도 그 흙먼지 속에서 보석을 캐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으나, 동시에 지독히도 동경했다. 내가 책장 너머의 관념 속에서 정답 없는 질문들에 매몰되어 있을 때, 그는 길가에 핀 이름 모를 풀꽃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주며 나를 현실의 따스함으로 끌어내려 주었다. 그는 나의 가장 가까운 이였으나, 동시에 내가 평생 가닿고 싶었던 아름다운 일상 그 자체였다.
그는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미리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타인의 시선이나 거창한 명분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발바닥 아래 놓인 현실을 긍정하며 홀로 우뚝 서 있을 수 있는 사람.
그는 무엇에든 적당한 거리감을 두면서도 다정한 친밀함을 잃지 않는 지혜를 가졌다. 타인에게 함부로 침범당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외롭게 두지 않는 그 우아한 경계선.
그는 항상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의 곁에서 나는 비로소 땅에 발을 딛는 법을 배웠으나, 동시에 그와 나의 거리를 실감하곤 했다. 내가 예상할 수 없는 대답으로 나의 좁은 세계를 넓혀주던 다름들. 우리는 그 다름 때문에 서로를 사랑했고, 그 다름 때문에 서로에게 깊은 생채기를 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이 대등한 마주 봄이라 믿지만, 때로 어떤 사랑은 도달할 수 없는 빛을 향한 선망이기도 하다. 그 빛은 나를 따뜻하게 데워주기도 했으나, 때로는 나의 그림자를 더 짙게 만들었다.
이제 그 빛이 떠난 자리에서 깨닫는다. 내가 사랑했던 것은 어쩌면 그 사람이라는 형체보다, 그가 세상을 대하던 그 경이로운 태도였음을.
그와의 이별이 유독 아픈 이유는, 단순히 연인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가 지향하던 삶의 이정표나 빛의 근원을 잃었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사랑은 시간이 지나며 흐릿해지겠지만, 동경은 그 사람의 가치가 여전히 내게 유효하기에 더 오래도록 마음을 흔든다.
이제 그가 떠난 자리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거두어 삼켜야 한다. 꼭꼭 씹어 삼켜 그가 견뎌냈을 아픔의 질감까지 온전히 느끼고 싶다. 그렇게 잘 썩힌 그림자가 언젠가 다시 나를 지상으로 불러올릴 거름이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