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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Jun 09. 2022

[책] 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단편집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 김인순 옮김
출판사 : 열린 책들


    소설 <향수>, <좀머 씨 이야기>로 잘 알려진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집입니다. 일반적인 단편소설보다 분량이 더 적어서 손바닥 장자를 써 장편(掌篇)이라고도 말하기도 한답니다.



[줄거리와 문장]     

1. 깊이에의 강요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리는 젊은 화가는 어느 날 평론가가 남긴 ‘깊이가 부족하다’는 말에 ‘깊이’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됩니다. 비평가의 말을 가지고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흔들리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결국 비극적인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죽은 뒤 그녀가 남긴 작품은 비평가에 의해 놀랍게 재평가됩니다.     


P11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P17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2. 승부     

노련하고 늙은, 체스 고수 장은 어느 날 그의 앞에 나타난 젊은 도전자에게 두려움을 느낍니다. 도전자의 범상치 않은 여유와 당당함에 사람들은 그가 대단한 고수라고 확신을 하지요. 장은 그 젊은이의 자신감으로 가득 찬 겉모습을 부러워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게임을 질질 끌며 상대의 실수를 집요하게 노려봅니다. 지지부진하던 경기는 당연히 늙은 고수의 승리로 돌아가지만 장은 오히려 자신의 패배를 처절하게 인식하는 혐오의 순간이 됩니다.      


P34 - 35

그 남자의 자신감과 천재성 그리고 젊음에서 오는 후광을 그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 낯선 이에게 감탄했으며, 심지어는 그가 승리해서 가능한 한 인상적이고 천재적인 방법으로 몇 년 전부터 기다리고 기다려 온 참패를 마침내 자신, 장에게 안겨 주기를 바랐었다고 고백해야 했다. 그러면 마침내 그는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물리쳐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났을 것이며, 마침내 구경하고 있던 악의에 찬 군상들, 이 시기심 넘치는 패거리들에게 만족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평온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는 다시 승리했다. 그리고 이 승리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체스를 두는 동안 내내 자신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낮추고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풋내기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4. 문학적 건망증     

많은 책을 읽고, 깊이 연구까지 했지만 자신이 읽은 책이 무엇인지, 내용조차 생각해 낼 수 없는 자신을 수치스러워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읽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P67

질문이 무엇이었더라? 아 그렇지, 어떤 책이 내게 감명을 주고, 인상에 남아 마음 깊이 아로새겨지고, 송두리째 뒤흔들어 <인생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거나>, <지금까지의 생활을 뒤바꾸어 놓았는가>하는 것이었지.


P70

오로지 나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발견하는 다시없이 새로운 귀중한 것에 정신을 집중한 욕망 그 자체일 뿐이다.     



이 단편집은 짧은 이야기 속에  심오한 성찰이 담겨 있는 듯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평소에 내면에 담고 있었던 질문들을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제목만으로도 위안이 되었습니다.

작가가 “깊지 않더라도 괜찮아.” 이렇게 위로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스스로 참 얕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깊이가 부족하다, 글을 읽어도 깊은 사유가 잘 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어쩌면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해 강요받고 있었던 평가는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작가의 의도와는 조금 빗나간 생각일지라도 문학의 힘이라는 것은 이렇게 내가 글을 통해 위로받고 변화하며 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체스를 두는 장면이 세밀하게 묘사가 되어 있어서 조금 지루하게 읽혔습니다. 다만 뒷부분에서 체스 고수 장의 괴로움과 놀라운 승부를 안겨다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맥없이 져버린 젊은 승부사의 그 당돌함이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보게 했습니다.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괴로워하는 고수 장과, 도전의 용기가 없이 욕망만 지닌 채 수군거리는 구경꾼들, 정렬적으로 용기 있게 돌진하는 젊은 도전자, 그들의 모습을 통해 현재의 나를 반추해 보게 되어 흥미로웠습니다.     


네 번째 이야기 

예전에 책을 읽고 나면 주인공은 물론 주변 인물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할 수 없는 것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기억력은 더 나빠지고 뭘 읽었는지 줄거리를 착착 요약해 내고, 요점을 정확히 파악해 내는 사람들을 보면 놀라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독서를 하고 그것에 대하여 깊이 있게 연구까지 한 사람조차 느끼는 건망증이라니 여기서 또 한 번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 뇌가 어쩔 수 없이 작용되는 것”이라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어디에선가 뼈와 살이 되어 지금의 내가 있으리라고 믿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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