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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Jun 04. 2022

봄의 기분

기억의 창고


오랜만에 친정집에서 가족모임을 하던 날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본다.

1남 5녀 모두 그 집을 거쳐 장성하여 각자의 가정을 이루었다.  

  

‘쌩’하고 집 앞 고속도로로 차들이 지나가면서 먼지바람을 일으킨다.     

봄이 되면 진달래가 수채화를 그리던 동산은 팔 차선 고속도로에게 길을 내주었다. 커다란 그늘 놀이터를 만들어 주던 아카시아 나무가 베어진 자리는 따가운 햇살만이 나를 반긴다. 가을이면 동글동글 윤기 나는 알밤을 선물로 주던 밤나무도 몇 그루 남지 않았다.


아카시아 나무 아래 앉아 하얀 꽃잎을 한 입에 후루룩 털어 먹고 남은 가지로는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올려 미용실 놀이를 하며 놀곤 했다. 나뭇가지를 풀면 내 머리카락은 푸들 강아지의 털처럼 곱슬곱슬해졌다.


나무 그늘 아래는 나와,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동네 친구들이 앉아 있다. 나의 형제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들은 일찍 독립을 해서 보금자리를 차렸다. 나와 띠 동갑인 둘째 언니는 가끔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가기도 했지만,  칠 머무르지 않고 떠나서 섭섭함과 허전함이 컸다. 나는 외로움으로 가득 채운 방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 빗장까지 단단히 채워 두었다.


가족모임은 간단하다. 저녁쯤 만나 밥을 먹고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나면, 점심이 돌아오기도 전에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간다. 짧은 만남이다.

평소 속마음을 털어놓거나 할 정도의 애틋함도, 상대방을 이해하는 심리적 깊은 관계도 미처 가지질 못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동네 산을 올랐다. 주말이면 산악인들로 붐비던 바위 절벽과 웅장 하고 깊은 계곡을 따라 새록새록 어릴 적 기억들이 떠올랐다. 바위를 미끄럼틀 삼아 타던 일, 해가 지도록 탐험가처럼 동네를 휘젓던 시간들, 친구들의 얼굴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지만 추억만은 또렷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산 입구까지 오르는 길은 둘레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세월의 소란을 피해 따뜻한 봄날처럼 추억의 볕을 쬐어 본다. 먼저 앞장선 남편과 형부, 남동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둘째 언니와 단둘이 남은 언덕길에서 나는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너 업고, 이 언덕을 얼마나 오른 줄 아니?”     


조금 숨이 차려고 하는데 언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 정말? 나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데, 엄마가 만날 나는 아무나 잘 업고 갔다고 했잖아, 순해서. 넷째 언니는 아무한테도 안 가서 엄마랑 언니가 매번 업어주고 그랬다고…….”     

“그렇긴 했지. 넷째가 징징거리긴 했어. 너는 순하긴 했지. 그래도 내가 많이 업고 다녔지.”     


‘아 그랬구나! 어쩜 그렇게 기억 속에서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을까?’

     

 나는 그때서야 알았다. 누군가 나를 돌보았고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밤이 늦도록 언제나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던 내 기억 속으로 저녁 무렵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엄마의 조급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겨울이면 함께 어름 집을 짓고, 미끄럼을 함께 타던 넷째 언니의 모습, 어린 나를 업고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는 따뜻한 둘째 언니의 등이 느껴진다. 아카시아 나무 아래엔 내 머리를 빗겨주는 언니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우리가 올라온 곳과 반대쪽은 내리막길이었다. 그래서인지 발걸음은 가볍고, 마음은 편안했다. 싱그러운 초록 숲 속에서 심장을 닮은 담홍색 금낭화가 조랑조랑 매달려 인사한다. 사랑이 무엇인지 말해주려는 듯하다.


수목원의 금낭화



꽃에게 자랑삼아 속삭여 본다. 


‘나도 언니가 엎어주고 그랬대. 혼자가 아니었다고!’     


모두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돌보아 준 가족들, 나와 함께 뛰어놀며 꿈꾸던 친구들과의 추억이 나를 이만큼 자라게 해 주었다고 생각하니 남은 시간도 기쁨으로 엮어갈 힘이 생긴다.

 

먼 시간으로부터 온 보살핌의 손길이 내 기억의 창고를 쓰다듬는다. 따뜻한 온기가 나의 기억 속에 사랑의 꽃을 피운다. 나의 마음에 찾아 날아든 나비와 꿀벌들의 날개 짓이 봄을 흥얼거린다. 들판으로 나가 봄의 기분을 맘껏 느껴 보자고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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