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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Dec 18. 2021

스펙터클 라이브러리

도서관은 고요하다. 밖에서 본다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매일 가방을 둘러메고 집 앞 도서관으로 갔다. 걸어서 5분, 하루라도 들르지 않으면 발에 가시가 돋칠지도 몰랐다. 나의 숨과 고뇌와 외로움과 쓸쓸함을 받아주는 곳. 나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친구들이 있는 곳. 나는 언제나 도서관에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들과 조용히 책을 읽다가 열정을 가지고 문화강좌를 수강했으며 린의 손에 이끌리어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했다. 방음문 안쪽, 도서관의 공연장은 언제나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똑. 똑. 투 둑, 투두둑, 후두두둑….

한쪽 천장에서 갑자기 물이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긴 물줄기를 만들어내며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도서관 공연장은 이미 200명가량의 유치원 어린이들로 가득 차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공연을 막 시작하려는 순간에 난감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도서관에서 1년에 두 번,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하는 어린이를 위한 ‘잔치’가 열리는 날이었다. 얼마 전 무더위를 대비해서 낡은 에어컨을 새것으로 교체하는 공사가 한창이더니, 그게 잘못되었는지 바로 그 자리에서 물이 떨어졌다. 다행인지 에어컨을 끄면 물줄기도 뚝 그쳤다.     


작렬하는 태양 <사진 출처 pixabay>

그해는 111년 만에 닥친 더위로 우리 모두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야말로 지구는 화롯불, 도서관 공연장은 그 화롯불에 잘 달궈진 고구마 같았다. 무더위 속에서 에어컨을 끈 채, 물이 떨어지는 자리는 비닐을 이용해 임시방편으로 수습하고 공연의 막은 올라갔다.


내가 속한 동아리는 도서관에서 일주일에 한 번, 지역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활동을 했다. 그리고 일 년에 두 번, 봄과 겨울에 동화잔치를 열었다. 동극, 인형극, 악기 연주, 율동 등 다채로운 내용의 공연은 아마추어답지 않게 알차서 지역 주민들에게 제법 인기가 많았다.      


도서관을 처음 찾은 건 언제쯤일까? 20대에 취업을 준비하며 매일 오르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외로움으로 허기를 채우며 헤매던 시간, 진학을 준비하며 홀로 공부와 씨름하던 시간들. 그러고 보니 언제나 내 옆에 도서관이 있었다. 그리고 결혼해서 첫째 아이를 키우며 막막하던 육아의 지혜를 얻으러 갔던 곳도 집 앞 도서관이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과 책을 만났다. 낯선 길을 헤맬 때, 가만히 다독이며 나에게 와 주었던 그림책, 나를 안아주고 위로해 주었던 도서관의 오래 된 책 향기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림책을 읽다가 그림책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다. 바로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는 봉사단체였다. 동아리의 공연을 처음 봤을 때, 아이와 자주 가던 소극장의 전문 배우들의 공연이 생각났다. 그곳에 출연하던 배우들 못지않게 연기를 하는 엄마들을 보고 놀랐고, 연출과 무대 준비를 모두 소화해 내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감탄했다. 연극을 워낙 좋아해서, ‘연극으로 만나는 그림책’ 수업을 듣고 있었던 나는 공연을 보자마자 이 팀으로 합류했다.     


동아리 회원들은 각자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 냈다. 동화 속 이야기를 각색하여 대본을 쓰는 작가가 되기도 하고, 우쿨렐레로 동요 연주를 하고, 동극에 등장하는 배우가 되고, 인형극의 목소리 연기자가 되었다. 필요할 땐 극의 소품뿐 아니라 무대장치도 뚝딱 만들어 냈다.

공연은 우쿨렐레 연주로 막이 올랐다. 빼어난 솜씨는 아니지만,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르며 박수를 치는 아이들의 환한 웃음으로 연주는 멋지게 완성되었다. 우쿨렐레만 있던 연주에 얼마 전부터 아코디언 연주자가 합류했다. 흔하지 않은 악기에 아이들은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고, 어른들도 흥미로워했다. 연주가 끝나고 인형극이 시작되었다. 목소리 연기에 맞추어 손 인형 역할을 맡은 사람이 인형의 동작을 책임졌다. 인형극 무대 뒤 좁은 공간에 쪼그려 앉은 목소리 배우와 인형 연기자들은 어둠 속에서 호흡을 맞추었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동극이었다. 옷과 분장 덕분에 동물 연기는 살이 있는 듯 생동감이 넘쳤다. 연기의 내공도 물론 무시할 수 없었다. 무더위 속에 동물 옷까지 입은 연기자들의 등줄기에는 땀이 쏟아져 내렸다.


30, 40대가 주를 이루던 동아리에 그해는 60대 언니가 3명, 신입회원이 되었다. 한 언니는 얼마 전 정년퇴임을 하고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 볼까 고민하며 여러 가지 일에 도전 중이라고 했다. 언니들은 공연 연습이 있는 날이면, 항상 일등으로 도착했다. 먼저 와서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놓고, 동생들을 기다렸다.    

 

“언니들! 나이 들어서 잠 없는 거 티 내지 말고 천천히 좀 오세요.”     


약속 시간보다 30여분 지나야 모두들 모여들기 마련인 것이 멋쩍어 내가 농담이라도 이렇게 던져보았다. 그리고 팔팔 끓어 오른 물에 커피 한 봉지를 털어 열정 한잔을 타면, 언니들의 도전처럼 뜨거운 커피 한 모금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가슴까지 따뜻하게 해 주었다.


공연 몇 달 전부터 계속되는 연습은 마치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난 일행처럼 어색했던 관계를 친밀하게 해 주었다. 연습 중간중간 소품을 만들기도 하는데, 손은 소품에 집중하는 사이 입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게 됐다. 아이들 이야기, 꿈 이야기, 남편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때론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때론 들어주는 상담사가 되어 주기도 했다.     


사람들이 모여서 가장 즐거운 시간은 뭐니 뭐니 해도 함께 밥 먹는 시간이다. 연습 후에 주로 가까운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는데 공연이 막바지에 다다르면 시간도 절약할 겸 배달음식을 먹기도 했다. 누가 먼저 밥이라도 해 오겠다고 단체 톡에 글을 올리면 반찬을 하나씩 준비하겠다는 댓글이 달렸다. 냉장고를 뒤져 찾아낸 갖가지 나물들이 한데 모이고, 비어지는 냉장고만큼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찼다.

 

사진 출처 pixabay

고슬고슬 잘 지어진 밥에 열무김치, 콩나물, 시금치, 무생채 등 알록달록 개성 넘치는 나물들의 향연, 여기에 고추장과 감초 같은 들기름 몇 방울이면 누구나 숟가락을 들고 양푼 앞으로 모여들게 만들었다.

만들기를 좋아하고, 그리기를 좋아하는 사람, 노래를 잘하는 사람,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말없이 조용히 뒷정리를 하는 사람,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의 열정을 쏟아내는 동아리 회원들의 모습이 커다란 양푼에 담긴 비빔밥처럼 맛나게 잔치를 완성해 냈다.      


함께 꿈을 이루어 가는 멋진 사람들, 그들과 도서관에서 매일매일 새로운 나를 발견했던 시간은 무릎 아플 걱정 없으면서 신나고 스펙터클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았다. 나이 들어도 문제없을 여행이다. 이제 그만 마스크를 벗고 나의 시간을 찬란하게 만들어 주었던 도서관으로의 여행을 다시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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