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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 Good Jul 20. 2018

부정적인 아빠?

아이들만의 대화법

 당신은 긍정적인 사람인가요? 아니면 부정적인 사람인가요? 


 세상에는 이렇게 긍정적인 마인드가 성공을 좌우한다는 다양한 표어와 책들이 서점에 가면 즐비하게 전시되어있다. 기독교 신앙인으로 약간의 논란은 있었던 책이지만, 한 동안 트렌드였던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긍정의 힘"에서도 ‘긍정’이란 단어가 등장하니 말이다. 
 
 항상 아이들을 대할 때마다 아내가 나에게 "당신은 너무 부정적이야"라는 말을 할 때 가끔은 인정하게 되면서도, 또 가끔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정확히 말하면 억울한 느낌이랄까?).  

이유인즉슨, 나의 대화법은 아이들과의 대화 과정에서 공감과 호응이 먼저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나타난 행동에 대한 잘못된 점이나 질책이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어떤 행동에 대해서 먼저 공감하면서 그냥 스마일 하면서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일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더욱이 요즘 같은 시대의 육아서는 정말 너무도 다양하다. 고전적인 육아로부터 벗어난 다양한 육아법은 고정관념을 깬다는 점에서는 신선한 맛이 있지만, 모두 자신의 경험(정확히는 자신의 자녀에 대한 경험)의 절대적인 근거와 잣대를 들이대다 보니 가끔은 읽은 사람들에게 절망을 주기도 하고 가끔은 자신의 육아 시간들에 대한 회의가 들게까지 한다. 도대체 육아를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남자아이가 셋이다 보니, 정말 같은 뱃속에서 나와도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감이 될 정도로 각자의 개성들이 참 뚜렷하다. 몸의 생김새부터 말하는 말투, 그리고 밥 먹을 때 숟가락을 드는 모양까지 너무도 개성이 철철 넘치는 것을 보면, 그래도 '이렇게 다르니 셋을 키우는 거지'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아이들이 모두 비슷하다면(그럴 수야 없겠지만) 늘 부모의 육아는 작은 우물 속에 파묻혀 균형 감각을 상실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렇게 각자 다르다 보니, 나와의 관계도 각각 개별적으로 다르긴 하다. 그 다른 만큼 어떤 아이는 대우해주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또 엄격해지기도 하고 요즘 사회생활로 보자면 엄연한 차별대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유독 첫째 아이에게만큼은 첫 아이라는 이유로 많은 관심과 사랑이 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관계의 정립이 힘들 때가 많다. 아마도 첫째는 내 평생 살아가면서 육아에 관한 한 늘 처음이기 때문에 그 앞서가는 과정에서 계속되는 시행착오 때문이랄까?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첫째 아이를 거쳐, 둘째 아이를 보면 또 여유가 생기고 그 바라보는 생각과 행동에 여지가 생긴다. 그러다 셋째 아이는 정말이지 강약 조절이 거의 완벽에 가까워진다. 결국 육아는 마음속 사랑은 가득히 하되, 바라보는 눈은 가끔 돌려줘야(모른 척)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매우 주관적인 처세가 지금의 나에겐 나름의 노하우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나의 문제도 바로 이 부분에서 발생한다. 나는 늘 아이를 아주(?) 유심히 바라보곤 한다. 물론 나의 의도는 사고가 나지 않을까 다치지는 않을까 아니면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선의'이지만, 이는 곧바로 '지적질'이라는 뜻하지 않는 결과를 매번 낳곤 한다. 이 결과적인 행동이 바로 내가 '부정적'인 아빠로 매도(?)당하는 지점이다. 
 
 사람들은 관심을 많이 받고 싶어 한다. 주목받고 싶어 하고 가끔은 인기를 얻고 싶어 하기도 한다. 아마 이것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관계 속에서 우월의 지위를 갖거나, 그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고자 하는 이들의 서로 다른 방법론 속에 포함되는 당연한 욕구이거나 욕심일 것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관심받고 싶어 하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 어린아이에게는 엄마 아빠에게 혼쭐난 후, 화가 난다고 전화해서 차 한잔 하자고 불러낼 친구도 없고, 바람 쐬러 나간다고 잠깐 나갔다 올 수 있는 능력(?)도 현재로선 없다. 오로지 엄마 아빠가 좋으나 싫으나 한 집안에 그들과 지지고 볶고 일정기간 동안은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아니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살아남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ㅠ).
 
 관심을 받자고 하는 일에 돌아오는 것이 관심이 아닌 '지적질'이고, 사랑을 받고자 하여 행동하고 말하는 것들에 돌아오는 것이 '올바른 지적질'이라면 아이들은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아니면 “이번엔 강도가 너무 약했어” 하면서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내심 심기일전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아이들과의 대화를 문자 그대로 '대화'로 인식하는 나는 언제나 아이들에게 원하는 답변보다는 엉뚱한 답변을 들려줄 수밖에 없는 '똑똑한' 아빠이자, 내 아내에게는 '부정적'인 아빠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집에서는 부정적이면서 밖에서는 긍정적인 '이중적'인 내가 아니길 바라며, 고심하다 찾아낸 결론은 '아이'와 '사람'은 다르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동네에 물건 팔러 오는 아저씨들이 늘 말하던 '애들은 가'에서 애들은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아이들이 사람 취급받을 때가 있다. 바로 엄마, 아빠로부터 받는 '훈육'이라는 이름의 '올바른 가르침'으로 불리는 '엉뚱한 대답'이 그것이다. 왜 그 지점에서 애들은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일까?
 
 아이들의 대화 속에 긍정과 부정은 아직은 이르지 않나 생각해 본다. 아이들은 아직 '사랑'과 '고마움'이라는 단어를 배우기 위해 사랑 '받아야'하고 고마움을 '느껴야'하는 시기이다. 그들은 이런 자신들만의 목적을 위해 오늘도 자신들이 가진 그 몇 안 되는 단어와 행동지침 만을 이용하여 '받고' 싶은 그 무언가를 요청하고 전달하기 위해 오늘도 엄아 아빠를 향해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다. 


육아는, 그 아이들의 몸부림에 대해 언제나 일관된 반응을 아이에게 보내줄 수 있는 인내와 노력, 그리고 지혜가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은 세상 유일하며 최고의 반응, 바로 사랑과 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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