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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나무 Sep 27. 2023

산책

나오길 잘했습니다.

가을이 언제 오려나 기다렸습니다.

잔서는 '아직은' 하며 산책을 망설이게 했습니다.


토요일 아침, 베란다 창을 여니 바람이 시원합니다.

상쾌함이 얼굴 피부에 와닿고, 저절로 깊은 호흡을 합니다.

'산책하기 딱 좋은 날이다.' 생각합니다.

커피를 내리고 서둘러 뒷산으로 향합니다.

가을 초입에만 느낄 수 있는 고유함이 눈에, 피부에, 코에 와닿습니다.

성급한 잎들은 단풍이 들었고, 밤송이도 떨어져 있습니다.

비가 많았던 까닭일까요. 나무 둥치에 초록 이끼가 물기를 머금고 생생하게 자랐습니다. 솔이끼인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과학시간 준비물로 솔이끼 채집을 나섰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봄꽃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들꽃은 아기자기, 별처럼 총총총 피었습니다.

며느리밥풀, 며느리밑씻개, 며느리배꼽은 유독 이 시기에 한창입니다.

꽃이름에 며느리가 붙은 까닭을 설명하곤 했던, 들꽃에 진심이었던,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선생님 얼굴을 어렴풋이 떠올립니다. 강원도 기행을 떠났던 때였지, 사북탄광도 갔었고, 정선 아우라지강 돌담길에 앉아 발을 씻었던 기억도.....기억은 숨어있다가 순간순간 되살아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 뒤를 돌아보고, 불쑥 지난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것임을 느낍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산책하는 중입니다. 그런데도 나무와 풀을 만나는 사이, 불쑥불쑥 사람들이 끼어들고, 지나간 시간들이 되살아납니다. 지금 이 순간이 과거와 만나며 새로워집니다. 기억은 그 사람이기도 하지요.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있어도,  기억은 아주 개인적인 영역입니다. 좋았던 기억이든, 슬펐던 기억이든, 그 기억들과 함께 내가 만나는 모든 것들이 다르게 내 안에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이니까요.


아무튼 나오길 잘했습니다.

자연과 만나는 것은 전환입니다.

바람이 불어 자연의 생명감은 더욱 생생했습니다.


'가을, 이때를 놓치지 말아야지' 생각합니다.



별처럼 초롱초롱 달린 들꽃을 당겨서 보니 더 예쁩니다.
소나무 둥지에 이끼가 초록초록 한창때입니다.


며느리밑싯개
떨어진 솔방울을 주워서 돌 위에 놓았더니 예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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