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악양면 평사리는 소설 '토지'의 무대이다. 박경리 문학관 마당에 서면 가을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악양들판이 넓고 풍요롭게 펼쳐진다. 확 트인 조망감에 가슴까지 뻥 뚫린다. 땅에 생명을 기대어 삶을 이었던 무수한 사라져 간 사람들, 그리고 자연과 시간의 섭리에 따르며 변함없이 이어지는 땅. 멀리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고 섰노라면 사라지고 이어지는순리함에대해 생각하고 아련해진다.
'박경리 문학관'에 들어서면 맨 먼저 '그래, 글기둥 하나 붙들고 여까지 왔네'라는 글귀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소설 토지를 완필하는데 25년이 걸렸으니, 글은 박경리 선생님의 삶의 기둥이요, 땅이요, 생명줄이었으리라.
박경리 선생님의 유품을 본다.
손때 묻은 두툼한 국어사전, 안경, 손돋보기, 수기로 쓰인 원고, 펜.
적확한 어휘를 고르기 위해 돋보기를 갖다 대고 숲을 수색하듯 국어사전을 뒤지고 뒤졌을 선생님의 모습을 그려본다. '토지'라는 소설을 써라는 신의 명으로 생명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면, 25년이라는 긴 세월이 어떻게 하나의 소설로 집약되고 관통할 수 있을까. 소설 속 인물들과 숨 쉬고, 눈 뜨고, 잠을 청하며 밤을 보내고, 그렇게 그들과 살을 비비며 살지 않고서야.
선생님이 가시고 남은 자리.
소박한 유품에서 선생님의 높고 숭고한 정신세계를 본다.
사람은 가고 가장 가까이 함께 했던 물건들이 남았다.
남겨진 것에서 그 사람의 정신세계를 만난다.이상하게도 우리는 남겨진 것들에서 살아있는 동안그토록 집착했을 육체 또는 외향적 모습을떠올리지는않는 것 같다. 무엇을 하며 시간 보내기를 좋아했는지, 어떤 말을 즐겨했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 이런 것들일까? 무엇이 남고 어떻게 기억되는가는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박경리 선생님의 유품을 보면서 '남겨질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나의 경우 언제나 나의 책상 맡에 놓여있던 성경, 검은 성모상(스페인에서 샀던), 탁자용 십자고상(왜관수도원에서 샀던), 나무재질 묵주, 개인문집 정도가 지금으로서는 나와 가장 밀착된 물건들인데, 딸과 아들이 이 물건들을 나의 유품으로 여기고 간직하게 될까? 간직하길 바라는 것이 부질없는 일일까? 쓸데없이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다가 남편에게 말을 꺼내 보았다.
"오빠는 내 유품이라면 뭐가 될 것 같아?"
내 손가락에 낀 묵주반지를 가리킨다.
"그냥 아무것도 남기지 말아야지. 뭘 남겨."
부모님을 모두 보낸 나는 늘 곁에 두고 기억할 징표가 필요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것이 부모님임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의 가정집에 고인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 남은 가족들이 시시콜콜 그들의 일상을 이야기하며 생과 사를 너머 변함없이 일상을 나누고 기억하고이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고 좋았다. 나도 부모님 사진을 피아노 위에 두고 오가며 보고 '저 잘 살고 있어요.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요. 못다 한 효도 할게요' 하며 혼잣말을 하곤 한다. 그러면 덜 외롭다.
물론 미리미리 정리하여 꼭 필요한 물건만 남기는 삶을 살아야지 생각하고 있다. 나중에 끝까지 남겨질 물건이 무엇이 될지 모르겠지만그 물건들이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손때묻은 물건에 나의 숨결이 깃들고 그 사물이 남은 사람에게 힘이 되고 따뜻한 온기가 되면 좋겠다.
고작 가족과 몇 명의 가까운 지인에게 '내 남겨질 것'이 그들의 삶에 '따스함 한 자락'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