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e나무 Mar 06. 2024

이곳, 내 사랑할 곳

새 학년 시업식, 아이들에게 가장 기본적이고 당연한 것을 당부했습니다.

비가 내려 교정에 고요한 기운이 감돈다. 아이들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이곳, 내 사랑할 곳이다.


교장 발령을 받고 나서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함에 몇 날을 흘려보냈다. 교사로서, 장학사로서, 교감으로서 옆에서 바라보았던 교장이라는 역할에 대해 가만가만 생각해 보고자 해도, 이곳 내가 발령받은 학교의 상황이 빠진 생각은 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교장임용예정 연수를 듣고, <훌륭한 교장은 무엇이 다른가>를 읽으며 마음을 다잡는 날들이 이어졌다.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한 채, 그저 '사람'을 중심에 두자고, 선생님과 아이들, 부모님들을 존중하며 편안하게 소통할 수 있는 교장이 되자고,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결대로 본연의 모습으로 근무할 수 있는 학교가 되도록 낮은 자세로 임하는 교장이 되자고, 부디 베풀며 사랑할 수 있기를 되뇌었다. 긍정은 긍정을 낳고 미소는 미소를 부르고 좋은 마음은 좋은 마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믿기에.


3월 4일 첫 부임 날, 아침 7시 10분에 집에서 출발해서 1시간 조금 넘는 길을 운전해 학교에 도착했다. 긴장한 탓일까 2년간 교육지원청 장학사로 근무했던 경험이 있는 지역인데도 멀게 느껴졌다. 모든 학교가 일제히 시작되는 날이라 그런지 고속도로에는 여느 때 보다 차들이 많았다. 7년 만의 장거리 출퇴근이다. 주차장에는 아직 차가 몇 대뿐이다. 첫 날인만큼 늦을까 봐 신경을 썼던 터였다. 일찍 오신 시설주문관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교장실 문을 열었다. 책상 위에는 동료들이 선물해 준 명패가 제자리를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모난, 금색의 고급스러운, 심플한, 뒷면에 '서로 사랑하라'는 문구를 새명패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응원으로 이곳에 있음을 느끼며 힘든 날들도 사람들의 이 온기를 기억하자고 생각했다.


9시에 시업식, 10시에 입학식이 있다. 선배 교장선생님이 보내준 자료들도 있었지만 나의 모습으로 다가가고 싶은 마음으로 인사말을 준비했었다. 출력해서 다시 읽어보았다. 준비한 인사말도 아이들과 마주 서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른다. 큰 핵심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학교 전체의 분위기와 아이들 반응을 보며 이야기 나누듯 자연스럽게 말해야지 생각했다.


2층 강당에 도착했다. 운동장이 실내 강당으로 바뀐 것 말고는 80년대 초등학교 조회 모습과 닮아서 짐짓 놀랐다. 좀 당황스러웠던 것은 강당 무대 위에 올려진 다소 권위적인(?) 단상이었다. 단상이 알게 모르게 너와 나 사이를 경계 짓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끔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용이 진정성이 있으면 형식은 뒤로 밀려 개의치 않게 되기도 한다.


요즘 초등학교는 예전과 같은 전체조회가 거의 사라졌다. 코로나 이후 방송이나 온라인을 활용한 모임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코로나가 끝난 지난해부터 시업식, 입학식 정도만 모두가 모이는 강당 조회가 이루어지고 있다. 방송조회도 특별한 일이 아니면 한 달에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급과 학년이 중심이 된 교육과정 운영이 교육활동의 주요 축이라 보면 된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어릴 적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은 제발 짧게 끝나기를 기도했던 시간이었다. 아무리 기억하려고 노력해도 아무것도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열중쉬엇 자세로 꼼짝없이 추위든 더위든 지루함이든 견뎌야 하는 시간이었다. 시대가 바뀌었고 21세기를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교장선생님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말로 다가가야 할지 고민되었다. 그런데 막상 교장으로서 아이들 앞에 선다니 나도 모르게 노파심이 생기고, 걱정이 앞섰다. 학교의 큰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몇 가지 당부하고 싶은 마음이 제일 앞줄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부인하지 말고, 이런 마음이 교장의 솔직한 마음이라면 그것을 전달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사랑과 진심을 담아 친근하게, 아이들이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 나누듯 자연스럽게 시업식 인사말을 하자고 생각했다.


<시업식 인사말에 담긴 내용들>
* 새 학년 새 출발 축하: 기쁨, 설렘, 긴장, 걱정 등 여러 가지 감정 읽어주고 공감하기
- 새로운 친구, 선생님과 서로 도우며 즐겁게 생활하다 보면 또 한 계단 올라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 전하기
* 양해 구하기: 모두가 모이는 강당 모임이 시업식뿐이기에 이야기가 조금 길어져도 경청해 주기를 양해 구하기
* 세 가지 당부의 말
  첫째: '사랑합니다' 인사말 하기. 부모님의 사랑, 선생님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 남녀 간의 사랑 등 사랑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상대방을 존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는 것. 옆에 있는 친구, 선생님께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하다 보면 우리 마음속에 사랑의 에너지가 커질 것이고 학교생활도 더 즐거워질 것이라는 내용

둘째: 자기 자신을 잘 지키기. 다치지 않기. 학교 오가는 길 차조심 하고 위험한 곳이나 행동할 때 자기 몸 잘 지키기. 건강해야 공부도 하고 신나게 놀 수 있다는 내용

셋째: 꽃으로도 때리지 말기. 부드럽고 향기로운 꽃으로도 친구를 놀리거나 때리기 없기.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이나 욕설은 맨 먼저 나를 향하고 나를 오염시킨다는 점. 학교가 즐거운 것은 친구와 함께 공부하고 놀기 때문. 그런데 친구와 다툼이 있거나 사이가 틀어지면 학교생활이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한다는 것. 놀면서 다툼이 생길 수 있지만 어떤 종류의 폭력도 행해지면 안 된다는 당부. 다툼이 생길 때면 서로 용서하고 더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을 하길 바란다는 당부. "옆에 있는 친구 한번 바라보세요. 사랑스럽지요! "
좋은 것은 아낄 이유가 없다. 사랑한다고 자주 말하면 좋겠다는 내용. 교장선생님도 노력하겠다는 약속하기.


당연한 잔소리지 일지 모르지만 모두가 모였을 때 이것만은 지켰으면 하는 것들을 당부하였다. 알고 보면 가장 기본적이고 당연한 것이 가장 소중한 진리임을 세월을 살수록 느끼고 있다.





교장실에 가방을 놓고 현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비 오는 날 아이들 등교하는 모습을 보고 아침 맞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삼삼 오오 등교하는 아이들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엄마 손잡고 등교하는 1학년도 보였다.

"사랑합니다!, 어서 와. 좋은 날 보내렴."

먼저 인사를 건네니 아이들도 "사랑합니다" 메아리 인사를 한다. 현관문에 옹기종기 놓인 우산꽂이에 자신의 학년과 반을 찾아 예쁘게 우산을 꽂는다. 아이들과 우산꽂이가 꼭  닮아서 귀여웠다.

점심시간 급식을 먹고 나오는데 몇몇 아이들이 작은 소리로 "사랑합니다" 인사했다. 몇몇은 급식소에서 조용해야 한다는 생각에 양손으로 하트를 그리며 내 눈을 맞추었다. 나도 덩달아 양손으로 하트를 그리며 웃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실내를 한 바퀴 돌아보는데 복도 구석구석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사랑합니다"하며 다가온다.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친구를 보고 "아니야, '사랑합니다' 해야지" 한다. 아이들이 시업식 당부말을 듣고 실천할까 내심 의심스럽기도 했는데 시작이 순조로운 것 같다.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힘이 되어야지 생각했다.


1학년 입학식 모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