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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 여백이 있는 해변 여행

by lee나무

애정하는 여행지가 있다. 물안개가 피어나는 새벽 북한강의 '고요'를 품은, 겨울이면 하얗게 언 북한강이 포근하게 감싸안는 남이섬, 싱그러운 천연의 숲이 숨 쉬는 곳 함양, 내 영혼의 쉼터 제주, 역사와 자연이 소곤대는 경주, 굽이굽이 산 능선이 병풍을 두른 듯 겹쳐 펼쳐지는 지리산 노고단, 그리고 이곳, 해운대. 문득 떠올리면 그립고 가고 싶은 여행지들이다.


나의 마음이 특별히 애정하는 여행지는 '이맘때, 그곳은, 어떠어떠하겠지' 또는 '이맘때, 거기서 우리 이러저러했었지' 하는 형태로 불쑥 찾아 든다. 새로운 여행지도 좋지만, 언제부터 일까, 나는 '그 계절에는 그곳'에 가고 싶어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나간 '나'와 지금의 '나'가 조우하고, 닮은 듯 다른 느낌으로 여행지를 감각하며 우리의 이야기도 풍성해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 별도의 준비가 필요치 않는, 편안하고 안정되는,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는 여행지라고 할까.


나는 북적대던 여름이 끝나고, 해수욕장이 폐장한, 다소 여백이 있는 이 즈음의 해운대를 좋아한다. 하얀 모래사장이 훤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사람들이 각자의 바다, 파도, 해변을 여유롭게 누리는 모습이 풍경처럼 펼쳐지면, 나도 모르게 그 풍경에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한 자리를 메우게 된다.


해를 거르지 않고 연이어 10월의 해운대를 찾은 것이 3년째다.


"10월 9일에 방이 하나 있길래 예약했어."


해운대에 가면 하얗고 보들거리는 모래 해변이 있다. 시야 앞으로 펼쳐지는 바다는 넓고 하늘과 맞닿아 있다. 파도는 마음의 수용거리만큼 딱 그만큼 밀려왔다 물러났다, 다가섰다 멀어졌다 반복한다. 바지 끝을 접어 올리고 맨발이 소금기 묻은 촉촉한, 속살같이 부드러운 모래와 닿을 때 나는 가없는 만족감, 간질거리며 차오르는 기쁨을 느낀다.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발등을 슬쩍 만지고는 얼른 도망가는 장난꾸러기 파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가끔 몰래 몸집을 키우고는 속도를 내서 달려와 방심한 나를 덮쳐도, 오히려 나를 더 경쾌하게 만드는 파도다.


연휴 마지막 날(10.9.~10.) 남편, 딸, 아들과 함께 해운대에 갔다. 연휴 동안 이곳 저곳 다니느라 피곤하기도 했기에 느릿느릿 준비해서 오후 늦게서야 도착했다. 광안대교와 광안리 앞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책을 보며 잠깐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딤섬 맛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서다.


'오늘은 기어이 웨이팅없이 먹고야 말 테다'는 심정으로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음식점에 도착했다. 몽글몽글 따끈한 육수를 머금은 만두를 맛있게 먹고 숙소에 짐을 풀고 해변으로 나왔다.



▲해운대의 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해변의 밤, 바람, 파도, 바다를 누리며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신발을 벗어 들고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해안가로 갔다. 맨발에 닿는 바닷물이 포근했다. 피부에 닿는 밤바람도 부드러웠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다와 파도와 바람과 밤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파도 보면 신기해. 계속 계속 밀려오는 게 마치 누군가 떠 미는 것 같아."
"그렇지. 살아있는 것 같지."


우리는 끊임없이 밀려왔다 물러났다 하는 파도를 바라보기도 하며, 맨발로 해변을 걷고 또 걸었다.


사람들이 밤 바다와 해변을 각자의 방식으로 즐기는 모습을 바라본다. 맥락도 없이 떠오르는 사람들과 상념들은 가끔 현실을 상기시키지만 그것도 잠시다. 밤이면 더 큰 울림으로 쏴~ 철썩대는 파도 소리와 하얗게 거품을 일으키며 맨발을 감촉하는 파도는 오롯이 나를 차지해버린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맘때 해운대에서는 다양한 버스킹도 즐길 수 있다. 구미에 맞는 길거리 공연을 골라 시간을 잊고 분위기에 젖어 보는 것도 좋다. 밤이 무르익고 출출해지면 야시장에 들러 구슬 떢볶이, 씨앗 호떡, 벌집 아이스크림과 같은 주전부리도 맛볼 수 있다. (씨앗 호떡 2개, 치즈 호떡 1개를 사겠다고 아들은 그 긴 줄을 견뎠다. 걷고 난 뒤라 그런지 오랜만에 맛보는 호떡은 꿀맛이었다.)


▲해운대의 아침 10월의 해운대 아침 햇살과 파도는 온화하고 부드럽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것 같다. 그녀는 해운대가 좋았고 1년 살이를 목표로 아이들과 이곳으로 이주했다. 그런데 3년이 지났건만, 그녀는 떠나지 못했다. 이유는, 아침 저녁으로 해변을 산책하는 기쁨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것. 나는 그녀를 이해한다. 10월, 내가 해운대를 찾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하니까. 적당한 온도로 촉촉한 모래 해변을 맨발로 걷는 기쁨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해운대의 아침이 밝았다. 일어나자 마자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서둘러 해변으로 나갔다. 해변에는 벌써 조깅하는 사람, 명상하는 사람, 유튜브 영상을 찍는 사람, 바지를 둥둥 걷어 올리고 맨발로 해변을 걷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아침 태양이 바다 위로 온화하게 쏟아지고,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해변의 아침을 맞이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풍경 속에 있는 이 시간이 나는 무척이나 만족스럽다.


▲파도와 노는 귀여운 아이들 엄마는 적당한 거리에서 아이들의 놀이, 천진함, 순수함을 지켜주고 있다.


엄마는 아이들이 파도와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조금은 떨어진 거리에서, 아이들의 천진함, 순수함을 지켜주며 놀이에 몰입할 수 있도록 절제된 말과 행동으로 격려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보았다.


"오케이, 굿!", "오케이~, 굿, 굿!"


엄마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온화하다. 2025년 10월 해운대의 아침, 파도와 놀이 삼매경에 빠진 아이들의 귀여움을 꺼내볼 때면 나도 모르게 미소 짓겠지. 사진을 찍는 이유다. 그때만의 색감, 감정을 기억하기 위해서.


주변에는 아침 요기 거리가 많다. (이른 아침 손님을 위해 문을 여는 음식점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샌드위치, 커피를 사고 집에서 가져온 사과와 바나나로 아침을 간단하게 해결한 뒤 송정으로 넘어갔다.


▲서핑하는 사람들 바다가 차가워지기 전에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


눈에 쏙 들어오는 송정 바다는 아담하고 정겨웠다. 바다가 차가워지기 전에 사람들은 서핑에 푹 빠져 바다와 즐겁게 놀고 있었다.


"10월에도 서핑하는 줄 몰랐어. 재미있겠다. 자유로워 보여!"


올 여름 제주에서 끝내 서핑을 못했던 딸이 아쉬움과 부러움을 토해냈다.


"그러게. 엄마 아빠도 더 나이 들기 전에 서핑 한 번은 해봐야 할 텐데..."


가을 햇살이 따가웠다. 송정 바다를 조망하기 좋은 죽도 공원 팔각정에서 청량감있게 펼쳐지는 광활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런 개방감이 너무 좋아. 바다색이 정말 예쁘다!"


올해 초 취직해서 직장인이 된 딸은 탁 트인 바다를 보며 사회 초년생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흘려보냈다. 그랬다. 우리는 해변을 걷고 바다를 보며 긴 연휴를 돌아보고 정리했다.


"각자 자리에서 갓생 합시다!"


우리는 일상으로 잘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고, 공부하고, 사람을 만날 새 힘을 충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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