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18개월 간 동반 육아휴직을 했다. 선천성 질환을 지닌 아이 덕분에 부부가 함께 공동 육아를 하게 된 것이 사연이라면 사연이랄까. 수백 번 고민 한 끝에 내린 '육아휴직'이란 결정은 여러모로 내게 굉장한 영향력을 끼쳤다.
아이 통원 치료 차 서울에 있는 병원을 오가는 일이 수월해졌고, 아내와 육아하며 대한민국 엄마들의 고충 또한 아주 조금은 알 수 있게 됐다. 회사에서 잠시 벗어나, 24시간을 스스로 설계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선 두 말할 것도 없었다.
육아휴직 중,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가장 소중했던 기억 딱 하나를 꼽으라면 과연 무엇이 있을까? '아이와 24시간을 함께 보냈다.'라는 사실 그 자체였다. 매일 아침, 쌔근쌔근 자고 있는 딸아이 옆에 누워, 녀석을 가만히 보고 있는 일도, 걸음마를 막 뗀 아이와 산책을 하는 일 모두가 내겐 참 특별했다.
딸아이는 기차를 참 좋아했다. 오죽했으면 짠돌이 아빠가 기차 장난감까지 사줬을까. 외출하는 날, 카시트 안에 앉아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전철에 환호하며 눈을 부릅떴고, 단어를 하나 둘 말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기차를 가리키며 "기차, 기차"라 외치며 연신 박수를 쳐댔다.
어느 날,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고 아내가 이런 제안을 하나 했다.
"우리 호떡이 전철 태워줘 볼까? 저렇게나 기차를 좋아하는데 한 번도 못 태워줬잖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거 좋은 생각이다."
항상 나보다 주도면밀하게 아이를 살피는 아내 덕분에 아이는 새로운 경험 하나를 앞두게 됐다.
"호떡아, 우리 내일 기차 타러 갈까?"
"기차?"
"응, 호떡이 기차 좋아하니까, 엄마랑 아빠랑 내일 같이 기차 타러 가보자"
딸아이는 엄마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기차를 탈 일이 없었다. 돌 전에는 아이가 너무 어려 지하철을 탈 엄두가 안 났고, 한편으로 자동차를 두고 굳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랬다. 내 중심의 사고 덕분에 아이는 본인이 그토록 좋아하는 기차 한번 타 볼 일이 없었던 것이었다.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던 8월의 어느 날, 엄마는 가방 하나를 아빠는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매일 오가는 길인데, 유모차를 밀면서 지하철역을 향하니 기분이 참 오묘했다. 기차여행을 가는 것도 아닌 단지 지하철을 타는 일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지하철 승강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전역에서 출발한 지하철이 서서히 속도를 늦추며 딸아이 앞에 멈춰 섰다.
치익. 문이 열리고, 딸아이가 지하철에 조심스레 올랐다. 딸아이, 생애 첫 지하철 탑승이었다. 오전 12시도 안 된 여유로운 시간, 열차 안은 고요했다. 아이를 엄마 옆에 앉히고 재빠르게 반대편에 앉아 아이를 관찰했다.
먼발치에서 보기만 했던 지하철을 탔을 때 아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차창 밖으로 쉴 새 없이 지나가는 나무, 다채로운 풍경을 보면서 아이는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그렇게 창밖을 쳐다보다가도 지하철이 속도라도 좀 낼 참이면 엄마 옆에 콕 붙어있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목적지에 도착해 내릴 차례가 됐다. 얼떨결에 엄마 손을 잡고 내린 아이는 문이 닫히고 멀리 떠나버린 지하철을 보며 그렇게나 울었다. 자기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인 줄로만 알았겠지. 그렇게 어른은 아이로부터 순수함을 다시 배워나가는 듯하다.
지하철은 나에게 어두운 공간이었다. 출근길엔 회사라는 전쟁터에 바래다주던 녀석이었고, 퇴근길엔 무거운 피로감이 항상 내 주변을 맴돌았던 공간이었다. 그렇게 내게 적막하고, 어두운 이미지를 담은 지하철은 딸아이로 인해 조금은 밝은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따금 홀로 지하철을 탈 때, 아이와 함께 두 손 꼭 잡고 지하철을 기다리던 승강장 번호 앞에 가만히 서본다. 두 발을 딛고 서있으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다. 그날의 분위기, 햇살, 온도 그리고 깔깔거리는 딸아이의 웃음소리까지 그려낼 수 있다고 한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어느 날, 엄마와 아빠의 손을 꼭 잡고 인생 첫 지하철을 탄 두 살배기 아이가 있었다. 지하철은 딸아이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환영해, 앞으로 너의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줄게."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