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육남이 Jul 29. 2024

이게 맞나 싶다

복직 후 맞이하는 7월의 첫째 날. 당찬 포부를 안고 사무실로 입성했습니다. 포부라고 해서 그리 거창한 건 아니고 '가족 중심으로 회사 생활하자'라는 신념을 갖고 복직에 임하게 됐습니다. 예전 같이 일만 하면서 살고 싶지도 않고 아이를 포함한 가족과의 시간이 가장 소중한 거니까요.



저는 구청 내 조직 개편으로 인해 새로이 만들어진 팀으로 배치를 받게 됐습니다.(왜 사내 TF팀 같은 거 있잖아요.) 기존에 해왔던 업무보다 조금 더 사이즈가 있어 보이는 업무를 맡게 됐는데, 처음 해보는 업무지만 관심 있는 분야여서 나름의 재미(?)도 있어 보였습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요.)



저희 팀은 팀장을 포함해 총 4명의 팀원으로 구성된 팀이었습니다. 기존에 업무를 해왔던 2명의 팀원과 새로 배치받은 팀장과 저 이런 조합으로 한동안 발을 맞추게 됐습니다. 업무를 해본 사람이 팀 내에 있다는 게 정말 큰 행운인데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멘땅에 헤딩은 안 해도 되니까요.



제 자리는 팀장 바로 옆 자리로 팀 내에서는 팀장 다음 정도의 위치에 해당했습니다. 공무원 조직 내에서는 '계주임'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개' 말고 '계'요.) 개처럼 일만 해야 하는 위치여서 '개주임' 같기도 하네요. 공무원 조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이 위치에 있다니 살짝 부담이 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여하튼 팀장님 그리고 팀원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에 곧바로 팀장님께는 아이 양육으로 인해 '육아시간'을 사용해야 할 것 같다고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직장과 집이 멀고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요.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맞벌이 부부의 숙명인 듯합니다.



참고로 공무원은 8세 이하의 자녀를 양육을 하고 있는 부모에게 36개월 간 하루 2시간 늦게 또는 일찍 출퇴근할 수 있는 '육아시간'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사기업에도 이런 제도가 있죠. 공무원 조직 또한 새로운 제도만큼은 선제적으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주 5일제 근무’도 그렇고요, 다양한 제도들이 시범적으로 행해지는 곳이 바로 공무원 조직사회입니다.



복직 후 첫 주에는 어떤 업무인지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다시금 회사에 적응하는 분위기로 '육아시간' 사용 없이 초과근무를 하며 늦은 퇴근을 이어왔습니다. 아이를 낳기 전과 같이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죠. 가족 중심으로 살아가기로 다짐했지만 부서가 어떤지 제 업무가 뭔지는 파악을 해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두 번째 주가 찾아왔습니다. 동사무소에 비해 구청의 업무는 역시나 생각만큼 무게감이 있는 업무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법에 근거해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게 공무원의 업무라고들 하지만 사실 업무를 하다 보면 예외와 변수라는 것이 정말 많아서 일일이 적용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사연이 있으니 케이스가 다를 수밖에요.



그 자리에서 처리할 수 없는 업무들이 대부분이고 깊이 고민해야 결과물이 도출되는 업무들이 많더라고요. 더불어 구청은 동사무소와는 다르게 결재 라인도 많아 윗선에 보고를 위한 보고서 작성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타 부서에서 협조로 들어온 제출 문서들도 많기도 했고요. 제 본 업무는 제쳐두고 자료 작성하느라 시간 보내기 일쑤였습니다. 업무의 전체적인 흐름을 알아내는 게 진짜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속한 자치구는 2년에 한 번 전체적으로 부서가 업무 이동을 하는데요, 업무에 적응될 만하면 새로운 부서로 발령을 내버립니다. 처음에 '바보'로 새로운 부서에 가서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쯤 바로 다른 새로운 부서로 이동해서 다시 '바보'가 되는 거죠. 이게 행정직 공무원의 운명이기도 합니다. 진급은 타 직렬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빠르긴 하지만요.



어떤 이는 공무원 업무가 거기서 거기라고 하는데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정도 공통된 업무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업무 외에는 모든 게 새로운 업무들이니까요. 저같이 새가슴인 공무원은 모든 게 낯설고 부담스럽게만 느껴집니다.



여하튼 7월 1일에 복직한 이후 결국 제가 '육아시간'을 사용한 날은 단 하루도 없습니다.(아이가 아파서 조퇴로 2시간 딱 한번 사용한 게 전부입니다.) '육아시간'을 사용한다고 해서 업무에 대한 배려가 따로 있는 건 아니고 같은 업무량을 시간을 압축시켜 쳐내야 하고 그러고 나서야 2시간 일찍 퇴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구조입니다. 이게 맞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분간은 '육아시간' 사용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결정한 일입니다. 업무를 아직 장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 그리고 시간 내 쌓여있는 업무량을 쳐내기에는 아직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 두 가지가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결국 아내와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저는 조직을 위해 당분간은 저를 희생하기로 했습니다.



자의적(?)으로 선택한 것이니 누구를 뭐라 할 수 없지만 '이게 맞나?' 싶었습니다. 제 기준에서는 '가족을 포기할 만큼 나에게 중요한 사안인가?' 싶기도 하고 이런 결정을 내린 제게 사실 좀 실망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러게요. 아쉽지만 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봅니다.



이런 체계는 사실 조직에서 앞장서 분명한 결정을 내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육아시간'을 사용하는 부모에게는 강제적으로라도 퇴근할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는 게 올바르다고 봐요. 방침서 등을 통해 근거를 명시하는 거죠. 이런 체계 없이 '육아시간'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부모 특히 아빠들 솔직히 몇이나 될까 싶습니다.



단 3주 만에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온 느낌입니다. 상황은 더 악화됐고요, 업무는 과중되고 있습니다. 저만이 갖고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모든 부모에게 해당되는 일이라고 봅니다. 제 딸이 먼 훗날 성인이 된 시점에는 환경이 훨씬 더 개선되겠죠? 그러길 바랄 뿐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