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실에서 백 원을 어떻게 써야 할지가 삶에서 가장 중요했지
왜 문방구 앞에 오락기가 있는 건지 왜 오락기에 돈을 넣으면 펑 소리와 함께 과자가 쏟아져 나오는지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락기에 돈을 넣자마자 아래쪽에 뚫린 과자 구멍에 손을 받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는 것은 문방구 앞 오락기 시스템에 익숙해졌다는 뜻이었다.
나무판자에 대충 못질해 놓은 의자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버튼에 땟국물이 질질 흐를 때까지 15인치도 안 되는 모니터 속에 나는 살았다.
기껏해야 한 두대 있는 문방구 앞 오락기에 내 취향이 아닌 게임이 생겼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게임이 빨리 사라지길 기원하며 백 원 이백 원씩 아끼는 방법뿐이었다. 그리고 오락실이라는 신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때쯤이었다.
유리창을 무슨 청테이프로 막아놨는지 할머니 무릎처럼 쩍쩍 갈라진 펀치기계 말고는 그곳이 오락실이라는 걸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 문을 열기 전 나는 또 속았다고 확신했다. 형들도 많고 게임도 많다는 그 오락실에서는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앞머리를 주황색으로 물들인 형이 학원 가방을 덜렁거리며 그 문을 열기 전까지는.
오락실이라는 신세계는 내게 오락기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내가 문방구 앞에서 다닥다닥 붙어서 하던 오락기는 진정한 오락기가 아니었다.
오락기 버튼을 닮은 철제 의자와 커다란 화면. 발로 밟고 손으로 쳐야 되는 신기한 오락기들을 지나.
나는 게임이 바뀌길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처음 보는 것도 모두 그곳에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문방구 앞 작은 꼬마들을 비웃으며 족히 15분은 걸어가야 하는 거리의 오락실로 출근도장을 찍었다.
가방엔 오락실을 가선 안된다는 가정통신문을 접어 넣은 채로 그 탈선의 현장에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실제로 나쁜 형들에게 오백 원쯤 되는 용돈을 탈탈 털리고 나서도 나는 차마 그 오락실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컵떡볶이도 슬러쉬도 포기하게 한 그 몇 백 원의 동전을 들고 오락실에 들어서면 나는 귀족이나 다름없었다.
이 몇 백 원의 동전으로 어떤 게임을 먼저 할지 어떤 순서로 게임을 즐겨야 할지 매일 설레고 기대돼서 학교가 지옥처럼 느껴졌다.
20평쯤 되는 공간에 게임이 수시로 바뀌는 오락기가 열대쯤은 있었고 그 선택의 즐거움은 아마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매일같이 몇 백 원으로 그 수많은 게임의 일부만 골라야 했던 나는 엄마의 지갑을 열어 무려 만원이라는 거금을 들고 그 오락실로 향했던 적이 있다.
몇 백 원의 기다림이 지겨웠던 나는 하루 종일 그곳에 있는 게임을 모두 해댔다. 저녁 8시쯤 날 찾아낸 엄마가 끌어낼 때까지 나는 그 오락실 안의 모든 게임을 다 해봤고 그런데도 돈은 5천 원 넘게 남았다.
당연히 그 날 나는 신나게 두들겨 맞았고 당분간 외출금지를 당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 다시 찾은 오락실에서 나는 전과 같은 설렘을 찾을 수 없었다.
최근 나는 새로운 게임들을 찾고 있다. 텅 비어버린 나의 시간들을 새로이 채워줄 즐거움. 그 즐거움의 유통기한이 점점 짧아질수록 주머니 속 몇 백 원에 설렜던 그때가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리고 다신 그때의 설렘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조금은 슬프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