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먼 기억 속

잊고 살던 기억들 속에서..

by 새나

데자뷔

:최초의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본 적이 있거나 경험한 적이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나 환상


분명 처음 가본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인데 익숙한 공기와 익숙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현상을 데자뷔라고 한다. 우리의 뇌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뇌세포에 기억을 저장해 둔다고 한다. 그냥 스쳐 지나간 일들을 수많은 뇌세포에 기억해 두고 있다가 유사한 경험이 눈앞에 펼쳐지면 뇌세포에 저장되었던 기억을 보여 준다. 무의식 속의 기억들은 이렇게 불쑥 예고 없이 튀어나오기에 처음 겪는 경험처럼 우리에게 보인다. 데자뷔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현상들은 이미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체 지나갔던 일들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매서운 바람이 불어대던 추운 겨울 날씨에 얇은 점퍼 하나를 걸치고 그네를 타고 있는 10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를 본 적이 있다. 처음 보는 아이가 이 추운 날 혼자서 그네를 타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친구 기다리니? 날씨가 추운데 얼른 집으로 들어가!"

얇은 점퍼와 빨개진 코를 보고 있자니 조금만 더 있다가는 감기에 걸려 버릴 것 같아 보였다. 여자아이는 별다른 대답 없이 발을 구르며 그네를 이리저리 비비 꼬기도 하고, 옆으로 왔다 뒤로 갔다를 반복하기만 했다. 아이는 이런 나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는지 나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고는 그네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집으로 갔는지. 친구를 만나러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10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 이 장면! 익숙한데. 저번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는 듯...' 하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처음 겪어보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30년 전의 나와 만났다. 무의식 속의 기억을 반강제적으로 끄집어내어 보기로 했다. 30년 전 그날도 매서운 바람이 불어대던 추운 겨울이었다. 진핑크색 솜털 점퍼를 입고 공주 그림이 그려진 핑크색 운동화를 신고 있는 나의 30년 전 모습이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던 여자아이와 닮아 있었다. 그날 나는 버스정류장 돌담 위에 앉아 매서운 바람을 그대로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동네 아줌마가 춥다고 얼른 들어가라고 말을 해도 나는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았다. 핑크색 솜털 잠바 주머니 속에 두 손을 넣고 어깨를 최대한 움츠리고 있던 나는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제천으로 일을 하러 갔던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 나는 매번 버스정류장에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련하게 기다리고 있는 나를 보고 있던 동네 아주머니가 아빠한테 이야기를 하는 날이면 나는 억지로 끌려 집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어련히 때가 되면 오지 않겠냐는 언니와 아빠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뭇내 아쉬움에 한숨만 내쉬었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도 엄마가 오지 않자 나는 또다시 버스정류장 돌담 위에 앉아 엄마가 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바람은 더 차가웠고, 양쪽 볼은 발갛게 얼어붙어 바람이 스칠 때마다 따끔거렸다. 솜털 점퍼 속에 넣은 손가락 끝은 감각이 점점 사라지고, 핑크 공주 운동화 속 발가락은 운동화 밖을 튀어나올 만큼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바람은 점점 더 세차게 불어 대고, 솜털 점퍼 속으로 파고드는 추위에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런 내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던 언니가 나에게 왔고, 나를 일으켜 세워 집으로 그만 들어가자고 했다. 고집을 부리며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나의 손을 끌고 집으로 들어가는 찰나 엄마가 버스 안에서 내렸다. 두 손과 두발이 꽁꽁 얼어 감각이 없어지고 양볼이 벌겋게 얼어붙은 나의 모습을 본 엄마가 미련한 곰탱이같이 매번 왜 이러냐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손을 잡고 집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뜨거운 물에 양발을 담그고 양손은 아랫목 담요 속에 쏙 집어넣었다.


추운 겨울 엄마를 기다렸던 나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던 여자아이의 모습을 통해 다시 조우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 여자아이도 나처럼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겪는 경험이 익숙하게 느껴질 때는 나의 지나온 시간 저편의 기억들을 하나둘 소회 하다 보면 얼추 엇비슷한 나의 시간들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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