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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꽃물이 들다

산방산 유채꽃

by 함지연

9아들과의 여행은 늘 걱정이 앞섭니다.

아들의 보호자 역할을 잘 해내야 할 것 같고,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어요.


이제 스물세 살이 된 아들은, 키가 180cm 가까이 되며 체중도 70kg이 넘는데 키는 아들의 어깨에도 못 미칩니다.

어느 순간부터 아들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일에

체력적으로 부담이 됩니다. 한 번은 서울 시내를

함께 돌아다녔는데, 아들은 끄떡없었지만 3만보를 훨씬 넘게 걷고 다음날 몸져누웠답니다.


아들이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자는 말을 한지는 꽤 되었지만 선뜻 그러자 못했었어요.

다음에...

언제 가냐 묻는 아들에게 계속 미루기만 했어요.


여행지에서 겪을지도 모를, '만약'을

붙인 부정적인 상황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죠.


만약 비행기 안에서 다른 승객에게 폐를 끼치면 어쩌지.

만약 복잡한 공항에서 대기 중에 길을 잃으면 어쩌지.

만약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쁜 사람의 꾐에 넘어가 따라가 버리면 어쩌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어쩌지.

신호등이 없는 도로를 건너다 사고를 당하면 어쩌지.


즐길 준비는 하지 않고 아들의 소원이니 제주로 가는 항공편과 숙소를 예약했습니다. 마치 밀린 숙제를 하는 기분이었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가 가정했던 부정적인 일들은 단 한 가지도 일어나지 않았고요. 아들과 나는 제주도를 함께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운전을 못하는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제한적이어서

주로 숙소가 있는 애월 주변을 돌아다녔는데,

하루는 버스투어를 신청했습니다. 협재 해수욕장, 용머리 해안, 카멜리아 힐 같은 관광지들을 대중교통이나 택시를 이용해서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내겐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활동적인 아들과 제주까지 와서 숙소 근처만 산책하며 보낼 수도 없었고요.


버스투어 덕분에 아들과 나는 제주의 여러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관광지에 내려 산책하고 사진도 찍고. 하루가 훌쩍 지나갔어요.


2월의 제주는 온통 꽃밭이었어요. 아들의 모습을 여러 장 사진으로 남겼어요. 사진 찍히는 거 귀찮아하는 아들의 뒷모습을 열심히 찍었습니다.


아들, 엄마도 사진 하나 찍어줄래?


기대 없이 휴대폰을 건네주며 유채꽃밭 사이에

섰어요.

구도를 보며 찍는다던가, 피사체를 화면 어디쯤 배치할 것이가, 라던지 고심해서 찍을 거라는

기대는 없고 그래도 제주에 왔으니 꽃밭에 선 사진 한 장은 남기고 싶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아들 덕분에 나의 인생샷을 건졌지 뭡니까.


어느 순간부터 독사진은 찍기 싫어했지요, 특히 정면 사진은 절대로! 내가 나이 들어 보이고 안 예뻐 보여서요. 휴대폰 속 갤러리에 내 얼굴은 없어요. 뒷모습이거나 콩알만큼 멀리 선 모습만 있어요.

그런데요, 이젠 뒷모습도 늙어 보여요.


아들이 찍어준 사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바로 동생들과의 단톡방에 자랑했습니다.


이거, 아들이 찍어준 나의 인생샷.


사진을 찍는 사람의 애정이 느껴진다나요,

그런 찬사를 받았습니다.

물론 아들이 신중하게 찍은 사진도 아니고,

하나 둘 셋,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조차 주지 않고, 그냥

찰칵했을 건데.

어쩌다 얻어걸린 건데, 엄마에 대한 아들의 사랑이

사진 속에 보인다니 빈말이라도 기분은 좋았습니다. 아들이 엄마를 사랑한다는데 안 좋을리가요.


바람에 흔들리는 노란 꽃잎들, 따뜻하게 올라오는 땅의 온기. 소곤거리듯 작은 주위의 소음들.


노란색을 한참 보니 노란 꽃물이 든 것처럼 행복해져서 아들의 손을 슬며시 잡았습니다. 유채꽃 사이를 손을 맞잡고 걷는다면 더 행복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다 큰 아들은 내 손을 뿌리치고 앞쪽으로 척척 걷습니다. 엄마 좋다고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엄마 옆에서 잤는데 다 잊었는지 배신하네요, 칫. 그래도 서운하지 않은 걸 보니 마음속에 노란 꽃물이 든 것이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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