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할 결심
늦은 밤,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대뜸 명품 가방을 사겠다고 했다. 함께 가서 어떤 것이 내게 어울리는지 봐달라고 부탁했다. 무슨 일이냐며 동생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게 왜 놀랄 일이냐면 내겐 단 한 개의 명품 가방도 없기 때문이다. 갖고 싶다는 욕망이 없었고, 매장 문이 열리기도 전에 줄을 서면서까지 가방을 사기 위해 큰돈을 쓰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동생이나 친구, 주변 지인들이 명품 가방이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고, 내게도 사라며 부추긴 적도 있었지만, 사지 않았다.
모임에 나온 누군가 결혼기념일 선물로 배우자에게 명품 가방을 받았다고 자랑한 일이 있다. 가방은 전혀 부럽지 않았는데, 기념일을 기억했다가 축하하는 배려는 부러웠다. 나는 그런 마음을 받아본 일이 없으니 받으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할 수 없다.
나는 가방값을 항상 피자나 치킨값으로 비교하곤 했다. 그 돈이면 피자가 몇 판, 그 돈이면 치킨이 몇 마리, 이렇게. 그런 내가 전화해서는 갑자기 피자 백 판을 넘게 살 수 있는 가방을 사겠다니 놀랄밖에.
이유를 묻는 동생에게 나는 헤어진 결심을 했다고 했다. 헤어진 결심을 한 기념으로 나에게 명품 가방을 선물할 거라고 했다. 자녀들 포함 주위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라도 이혼을 하는 게 맞다고 조심스럽게 조언하던 때였다. 나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느라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통화를 한 바로 그 주말에 동생과 이천 롯데아울렛으로 향했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가, 왜 그 비싼 가방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을까, 하는 의문을 수십 년 동안 지니고 살았던 사람 아닌가. 기필코 사고 말리라던 처음의 결심은 약속한 날짜가 다가올수록 점점 작아졌다. 왜 그런 말을 성급하게 내뱉었을까 후회했다. 가지 말자고 할까. 그러면 동생이 휴일을 망쳤다고 화를 내지 않을까. 몸고생, 마음고생을 그렇게 했는데, 나를 위해 돈 오백도 못 쓰냐고 큰소리쳤었는데. 처음에 동생에게 호기롭게 말했던 금액은 점점 줄어들어 아울렛에 도착했을 땐, 백만 원에서 이백만 원 사이로 한도를 정했다. 속으로 다짐했다. 마음에 드는 가방이 없으면 그냥 사지 말아야지.
가방과 구두와 옷을 파는 매장들 사이를 걸으며 투명한 유리문 안쪽의 반짝이는 것들을 구경했다. 여러 브랜드를 판매하는 매장에 들어가서 제일 높은 진열대에 있는 가방을 가리키며 보여달라고 하니, 판매 직원이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아기 다루듯 가방을 내려 보여주었다. 동생과 내가 번갈아서 매어보고 거울 앞에 비쳐보며 의견을 나눴다. 예쁘기는 한데, 정장에만 어울릴 것 같다, 나는 자주 사용하고 싶으니 데일리로도 할 만한 디자인과 크기를 원한다. 매장 안을 천천히 다시 둘러봐도 한눈에 들어오는 가방이 없어서 나오며 동생에게 속삭였다.
한 군데만 더 보고 그냥 밥이나 먹고 가자.
두 번째 매장의 직원은 목소리가 크고 명랑했다. 친절하게 설명해주길래 고개를 끄덕여가며 편하게 가방을 구경했다. 미리 백화점과 인터넷으로 봐둔 디자인의 가방이 마침 그 매장에 있었다. 그런데 직접 매보니 체구가 작은 내게는 어색했다. 직원이 다른 가방을 추천했는데 동생도 이것이 훨씬 잘 어울린다고 했다. 평소 휴대하는 것이 많은 내게는 너무 작은 듯했지만, 그 가방을 사기로 결정했다.
일시불로 결재한 가방의 가격은 백오십육만 원. 더 고민하지도 않고 단 30분 만에 쓴 가격. 물론 내가 산 가격의 몇 배는 더 줘야 살 수 있는 가방도 수두룩 하지만, 백오십육만 원은 이제껏 내 것을 사기 위해 쓴 최대치의 금액이었다.
몇 년 전,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았는데, 그때 받은 진단명은 우리나라에만 있어서 대체할 외래어가 없다는 바로 그 ‘화병’.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화가 한순간에 폭발했나 보다. 약물치료와 함께 세 곳의 상담센터에서 세 명의 상담사를 만났다. 첫 번째 상담사와는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 일 년을 만났다. 반쯤 상담이 이어졌을 때, 그는 내게 이혼을 권유했다. 그때의 내게는 도망가는 방법밖에 없음을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상담사는 내게 변호사를 소개하겠다고 했다. 갈등을 겪는 배우자와의 결별을 간절히 원했음에도,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 마음은 점점 확고해졌음에도 나는 미루고 있었다. 그때는 쉽게 결정하기에 어려운 상황이었다. 위의 두 아이는 이미 성인이었지만, 장애가 있는 막내가 미성년이었다.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의지하는 사람이 나인데, 정작 엄마는 무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헤어질 결심을 했다. 결심이 다시 작아지기 전에 서두르고 싶었다. 참고 견디고 무력하기만 한 내가 불쌍해서 그곳에 나를 두고 싶지 않았다. 더는 나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가방을 선물한 뒤 곧바로 변호사를 선임하고 이혼소송을 시작했다. 소장을 보내고, 부동산에 대한 압류를 신청하고, 법원에서 보내온 여러 장에 걸친 서류에 유책 사유와 혼인기간 동안 있었던 세세한 문제들, 재판부에 전하고 싶은 말을 써서 제출했다.
거기 그런 질문이 있었다. 자녀 양육의 비율은 모와 부가 몇 대 몇입니까. 오래 생각하지 않고, 90 대 10이라고 썼다. 나는 한 아이가 아플 때, 멀쩡한 두 아이까지 같이 데리고 입원했을 정도였으니까. 열이 40도인 애를 들쳐 업고 새벽에 응급실로 정신없이 뛰었으니까. 응급실 앞에서 혼자 울었으니까.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서류에 적힌 질문을 딸에게 했더니 하는 말, 100 대 0 아냐? 이런 질문도 있었다. 이혼을 원하는 정도를 1부터 100 사이의 숫자로 묻는. 생각도 할 필요 없이 이건 100%.
소장을 받은 배우자의 이혼 의사는 0%였고, 극명한 의견 차이로 소송은 이제 일 년 반을 넘어간다. 변론과 변론과 변론, 조사와 조사와 조사. 가정법원 3층 복도에서 조사관을 기다리는 동안, 원고와 피고는 이쪽과 저쪽 끝에 멀찍이 앉은 채 서로를 외면한다. 조사실에 나란히 앉아 나와 다른 상대방의 기억을 듣는 것도 마음을 괴롭혔다. 세 시간씩 세 번의 대면 조사가 있었다.
가정법원 3층 창가에서는 목련 나무가 보인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더 많겠지. 그런데 나는 그 봄, 서늘한 복도에서 바라본 찬란한 꽃송이를 여전히 기억한다.
백오십육만 원을 주고 산 명품 가방은 지금 벽에 걸려 있다. 실제로 들고 외출한 건 단 세 번이다. 한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동창 모임과 한 번의 가족여행. 그 이후로는 살 때 받은 파우치에 담아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결혼식과 얼마나 많은 모임이 있어 이 가방을 들고 가겠는가. 챙겨야 할 것이 많은 내게 휴대폰과 카드 지갑 정도 겨우 들어가는 가방은 손이 가지 않았다. 이것저것 다 넣어도 헐렁하고 아무 데나 던져 놓아도 신경 쓰이지 않는 천 가방이 지금도 제일 편하다. 나도 명품 가방이 한 개는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기도 해서, 이럴 바엔 서랍 속이 아니라 눈앞에 두고 보기라도 하자, 싶은 마음에 잘 보이는 곳에 걸은 것. 그래, 고급스럽고 예쁘기는 하다. 인정. 예쁜 것을 실컷 보다가 딸에게 물려주면 되겠다.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대상에 가방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확실히 알겠다. 내가 사랑하는 아름다움은 이런 것들이다. 고요한 숲, 얕고 깊은 바다, 저마다 예쁜 이름을 가진 꽃, 문득 알게 된 낱말, 골똘히 들여다보게 되는 문장, 그리고 성장하는 사람.
헤어질 결심은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고, 여주인공인 탕웨이의 대사이기도 하다. 탕웨이가 했던 이 말이 그녀의 목소리로 귓가를 맴돌았다. 계속 머뭇거리기만 하던 중이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결심을 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탕웨이의 목소리가 아닌 내 목소리로 소리 내어 말했다.
헤어질 결심을 했어.
그러자 그 말이 내 귀에 명확하게 들렸다. 자녀들과 원가족, 가까운 지인에게도 내 목소리로 말했다.
헤어질 결심을 했어.
나는 아직 원고이다. 앞으로도 변론과 변론, 조사와 조사가 이어질 테고, 정식 재판은 시작도 안 했으니, 완전히 헤어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한 장소에서 한 발을 떼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로 했다는 것만으로도 내 손등에 도장을 찍어주고 싶다. ‘참 잘했어요’라고 선명하게 찍힌.
덧붙이는 말: 이 에세이는 2024년 책나물 출판사에서 전자책으로 출간된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에 실린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