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이사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아직 정확한 날짜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4월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부지런히 이사를 마무리하고 5월 가족 행사는 내 집에서 하면 어떨까 싶다. 매년 어버이날에 함께 모이는데 내년에는 집들이를 겸해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아직 내 머릿속에만 있고, 가족들에게는 이사를 한 후에 제안할 것이다.
2년 반 전, 대부분의 짐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 이사를 왔을 땐
집이 좁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물건이 없었다. 살면서 놀랍도록 짐이 늘어났고,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공간이 점점 비좁게 느껴진다. 보이는 곳도 그렇고, 보이지 않는 곳에 쌓인 물건도 엄청나다.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는데 ⁸무심결에 대용량으로 산다. 청소용 베이킹소다는 무려 15kg이고 액체 세제는 여섯 통이나 남아있다. 앞으로 매일 빨래를 하면 다 쓸 수 있을까. 저 무거운 것들을 전부 다 짊어지고 이사를 해야 하나, 심란하다.
냉장고도 심각한 수준이다. 냉동실과 냉장실 모두 가득 찼다. 어쩌면 냉동실 가장 안쪽에 이사를 오던 당시 구입한 식재료 유물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이사 가기 전까지 냉장실과 냉동실에 있는 재료를 몽땅 먹어 치워야겠다. 냉장고 파먹기 일주일차인데, 다양한 먹거리가 있어서 우유와 계란 말고는 살 일이 없다. 오늘 저녁은 다시마 초무침과 소고기 몇 점과 당근을 왕창 넣은 카레, 그리고 들기름에 지진 묵은지. 본의 아니게 무지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시작한 것은 중고거래. 당근마켓에 판매글을 우다다다 올리기 시작했다. 식재료는 내 뱃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크고 작은 물건들은 일부 처리를 해야 할 것 같다. 가져갈 것, 버릴 것, 팔 것을 구분하느라 물건들을 꺼내 펼쳐놓고 나니, 참으로 난감하다. 언제 또 나는 이렇게 잡동사니를 늘렸을까.
감정 소모를 겪으며 하루를 꼬박 들여 정리했던 사진들. 2년 반 동안 나는 그 사진을 꺼내본 적도 없다. 추려왔던 사진들도 다시 반으로 줄이는 것이 좋겠다. 두어도 어차피 나만의 추억일 뿐인데, 새 집으로 가며 다 들고 가지 말아야지.
계약금을 입금하던 날, 처음 올린 판매글은, 화분 두 개였다. 벤자민과 카랑코에 식물이었는데, 새 집은 식물이 잘 자랄 환경이 아니라, 바람이 필요한 두 개를 보냈다. 그릇장에 있는 유리컵, 선물 받았지만 읽지 않은 책과 옷, 작은 가방과 파우치도 차례로 팔렸다. 시간 여유가 있을 때마다 판매글을 올리고 있는데, 앞으로 중고거래를 하느라 바쁠 것 같다. 이사가 임박해서는 가스레인지와 에어컨 등 큰 가전제품들도 판매해야 한다.
당근마켓 개인 프로필 옆에 숫자로 온도가 표시된다. 거래가 종료된 후, 판매자나 구매자의 평가나 회사 측의 규칙에 따라 온도는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99도.
나의 당근온도는 99도인데, 이 숫자가 최고치이다. 처음 앱을 깔고 회원가입을 하면 받는 기본 온도가 36도가 조금 넘는데, 2년 반 전, 이사 준비를 하며 99도를 찍었다. 많이 팔고 나눔도 많이 했더니 온도는 금방 올라갔다. 이게 뭐라고 99도가 되니 기분이 좋아 주위에 자랑도 하고 다녔다.
내가 이래 봬도 당근 99도인 사람이야.
(학창 시절, 99점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인지라, 이런 호들갑은 이해를 해 주시길)
며칠 전, 노란색 꽃무늬가 있는 빈티지 유리컵을 사 간 사람은 60대 후반의 남성이었다.
거래를 하고 돌아가서 채팅방에 그는 후기를 남겼다.
따뜻하네요.
무슨 의미인가 했는데, 당근 온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중고거래로 만난 사람이 나의 당근온도를 인정해 주니, 기분이 갑자기 좋아졌다. 99도를 뚫고 100도 이상이 될 것처럼. 당근관계자님들께 제안이라도 할 것처럼. 당근온도는 99도가 최대치란 말입니까. 99도 회원은 그 이상 뜨거워지고 싶단 말이지 말입니다.
물론 판매만으로 99도가 되지는 않는다. 구매도 잘해야 한다. 매너 있게. 그래야 판매자로부터 긍정적인 거래 후기를 받는다. 최고예요. 판매자의 평가는 당근 온도에 영향을 준다. 온도를 올릴 것인가. 내릴 것인가.
이사를 앞두고 짐 비우기 프로젝트에 돌입한 상태이지만, 솔직하게 고백하면 나는 판매자이면서 구매자이기도 하다. 있는 것만으로 버티자, 결심했지만 그래도 마침 똑 떨어지거나 필요한 것이 생겼다. 귤을 한 박스 샀다. 물티슈를 7개 샀다. 커피믹스를 100개 샀다. 다 필요한 것들이다. 백일 동안 소진할 수 있는 것들이다. 아들이 좋아하는 쿠키도 샀다.
쿠키를 판매했던 사람은 2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전철역 앞에서 만나 물건을 건네받았다. 제품은 쿠키인데, 초콜릿과 사탕 몇 개를 더 넣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고맙다고 인사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는 99도인 사람 처음 봐요.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당근 온도가 99도가 되냐고 사뭇 진지하게 묻는 것이다. 예상 못한 질문에 나는 크게 웃어버렸다. 그리고 한 가지 팁을 알려주었다. 그건 그녀도 이미 하고 있는 방법이라 비법도 아니다. 중고 거래를 하기 위해 만날 때, 그녀가 오늘 그랬듯이 작은 선물이나 감사인사를 쓴 손 편지를 건네는 것. 99도인 나는 판매를 할 때, 본 제품 사이에 작은 선물을 슬쩍 끼워서 보낸다. 양말이나 머리를 묶는 고무줄 같은 것, 이벤트가 있는 달이면, 좋은 말을 예쁜 종이에 써서 주기도 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요즘은 새해에도 건강하고 행복하고 많이 웃으시라고 덕담을 쓴다. 그런 사소한 것에 사람들은 즐거워한다. 그리고 후기를 남기지. 최고예요.
어떻게 하면 99도를 받을 수 있는가,라는 주제의 원데이 클래스를 열어볼까. 아니면 전자책을 만들어 거 배포할까. 혹시 개인 과외가 필요하신 분은 연락 바랍니다. 제 연락처는 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