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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먼저 독립할게

by 함지연

어깨에 짊어진 짐 하나를 내려놓게 된 일이 생겼다.

계획했던 것보다 빠르게 결정된 일이고, 아직 진행 중이지만,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실제로 어깨의 무게감이 덜어지며 한결 가볍게 느껴진 것이다. 고질적으로 겪는 계절성 우울감마저 옅어지게 할 만큼. 책임감이라는 무게가 너무 버거웠던 모양이다.


첫째에 이어 둘째 딸의 분가가 결정되었다. 2년 전 이사를 서두르며 둘째 딸에게 독립을 제안했는데, 경제적인 자립을 하지 못한 상태의 딸은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전세계약이 끝나며 새로 이사할 집을 알아보며 고민이 생겼다. 이번에 이사하게 되면 오래 거주할 계획이다. 노후에 주택연금을 선택할 수도 있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거주지일수도 있다. 노년기에 자녀와 동거할 생각은 아예 없으니, 그 이전에 자녀들은 내 집에서 떠나게 될 것인데, 그러자면 최종적으로는 혼자 지내게 될 집이 굳이 넓을 필요는 없다. 자녀들과 계속 동거하려면 넓은 집으로 가야 할 테고, 경제적인 부담이 있다. 독립 얘기를 꺼내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딸도 분가에 긍정적이었다. 지난주부터 딸이 거주할 집을 알아보고 있다. 좋은 티를 내지는 않지만 딸을 독립시킬 생각에 즐겁다.


노년기를 앞둔 우리 세대에게 자녀의 독립은 고민거리이다. 우리 부모세대에게 자녀의 독립은 쉬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20대 중후반의 나이가 되면 대부분의 자녀들은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부모로부터 독립했다.

지금은 어떤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업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일이 년, 많게는 몇 년에 걸쳐 취준생 신분으로 경제적인 독립은커녕 여전히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한다. 대학을 다니며 휴학이라도 한두 번 한다면 그 기간은 더욱 길어진다.

취업에 성공해도 비싼 임대료와 생활비는 독립을 망설이게 한다. 대학가에 오래 거주했던 나는 원룸과 투룸과 고시원, 오피스텔의 전월세 시세를 자세히 알고 있고, 청년층이 월급만으로 주거비와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런 현실을 부모세대가 모르지 않으니 독립을 강하게 권유하지 못하고 성인자녀와의 동거를 이어간다.

결혼 연령도 점점 늦어져서 이제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결혼하고

40대의 결혼도 쉽게 볼 수 있다. 비혼을 선택하는 비율도 점차 높아진다. 그런 현실이 놀랍지도 않은데, 문제는 이제 우리가 점점 나이 들어간다는 것. 먹어야 할 약봉지는 늘어만 가고 이제껏 해왔던 가사노동 역시 크게 줄지 않았다.


조건 없이 마구 퍼주어도 마냥 행복했던

사랑은 시간이 지나며 차츰 식는다. 모성은 미성년자녀를 양육하는 동안은 힘을 발휘하지만 차츰 그 힘을 잃어간다. 그게 자연의 순리라고 생각한다.

모성이 영원한 의무라면 그건 어머니의 삶을 살아가 느는 여성에게 가혹하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 환갑의 자녀의 시중을 드는 어머니의 삶은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모성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사회의 분위기를 접할 때마다 마치 어머니에게 주는 형벌 같아서 숨이 막힌다.


자이언트 판다 아이비오도 자신이 낳은 딸 셋을

3살에 독립시켰다. 아예 공간을 분리했고 이후에 더는 만날 수 없다. 그건

인간이 만든 동물원의 규칙이 아니라 판다의 습성이다. 모든 동물은 자녀 양육 기간은 몇 년에 불과하다. 거북이는 알을 깨고 나오자마자 독립한다. 야생을 살아가는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미약한 존재인 새끼에 대한 모성 또는 부성은 위대하다.

그렇지만 평생 끼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가도록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킨다. 식물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유전자를 자신의 곁에 두지 않고 최대한 멀리 떠나보낸다. 부모로부터 멀리 가서 독립하려고 상수리나무의 열매는 동그랗다.


50대의 누군가는 여전히 취업 준비생인 30대 자녀의 학원비와 용돈을 챙겨주기 위해 일터로 나간다.

어떤 어머니는 사과조차 직접 깎아먹지 못하는

자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어머니는 깎아다 바친 과일을 먹고 나서 접시도 치우지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누군가는 돈을 모으기는커녕 매일 집 앞에 배달음식과 택배상자가 쌓이는 것이, 누군가는 자신의 방조차 청소하지 않는 자녀를 보는 것이

괴롭다.


전세로 들어온 집은

이전에 살던 집보다 훨씬 좁아졌고 갈등이 생겼다.

사소한 것들에 불만이 쌓였다.

화장실청소라던가 수건빨래라던가 싱크대의 기름때라던가 쓰레기통 비우기 등등 등등 등. 이사 후에도 내 가사노동의 비율은 그대로이다. 이 집의 가사노동은 대부분 내 몫이다.

자녀는 자신의 집이 아니고 자신의 영역이 아니니

적극적으로 가사노동을 할 생각이 없다.

나는 나의 영역이니 기꺼운 마음으로 쓸고 닦고 반짝이게 해야 할 텐데, 혼자에게 주어진 노동이

점점 버겁다.

혼자 사는 집보다 식구가 늘어날수록 해야 할 일이 많아지는 건 당연하니까. 다섯 명이 거주하던 집에서의 가사노동도 쉽지 않았지만, 식구가 줄어든 지금 그 일이 수월해진 것은 아니다. 밥상 차리기의 지겨움은 극에 달했다.


엄마인 내가 먼저 자녀에게 분가하라고 하는 건 나쁜 엄마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모성이 부족하거나 없어서인가. 마음이 복잡하지만, 어깨에 얹은 짐을 이젠 하나씩 내려놓을 시기가 아닌가 싶다.

이십 대 후반의 딸에게도 자신만의 살림을 살 순간이 온 거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치약을 고르고 스스로 그릇을 선택하고 스스로 저녁 반찬을 고민하고 자산이 번 돈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독립적인 삶.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연리지처럼 얽히고설킨 기형적인 삶을 끊어내야 할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이제야 비로소 어머니라는 역할에서 점차 독립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부터는 나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나를 위해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그리고 나를 위해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는 독립생활을 만끽할 계획이다.

미안하지만 엄마가 먼저 독립할게.

내년 봄, 요즘 핫한 화사의 노래 제목처럼 good goodbye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속으로 조용히 외쳐본다. 엄마 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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