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의 나열로 벼랑끝까지 몰고가기
나는 싸움을 잘 못한다. 아니 어쩌면 싸움이 싫어서 적당히 맞춰준다는 말이 맞을거 같다. 양보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내 위치에서 최선을 해서 상대에게 신뢰를 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 적도 없고 온화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듣는 편이다.
좋게 평을 하자면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싸움을 피하는 비겁한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만의 문제라면 상관하지 말라고 할 수 있을거다. 그러나 집안의 가장으로서 혹은 조직의 선배나 관리자로서 주변 사람을 대신해서 싸워야 할 경우에는 분명 비겁하게 비춰질 수도 있을거 같다. 어느날부터 이런 나의 모습에 대해 조금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말도 잘하고 논리도 뛰어나고 성질도 적당히 잘 부려서 이슈를 해결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사람들을 보았다. 좀 부러웠다. 삶 속에는 주변 사람들의 일에 내가 나서야 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투력이 뛰어난 사람을 보면 그냥 부러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이 쉽게 바뀔 수는 없었다. 싸움은 기술적인 노하우도 필요하고 성격적인 부분도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무작정 나를 바꾸려 하지말고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근래에 내가 생각해본 싸움의 방식은 '사실을 기반으로 상대방에게 질문하기'이다. 싸움에서 승패의 판가름은 사실 확인과 그것에 대한 제3자의 객관적인 인정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황만 제시하거나 사실을 왜곡한 후 우월적 지위 혹은 언변으로 싸움을 이기는 경우가 많을거 같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사실에 대한 정확한 기록과 증빙마련이 우선 필요하다.
이런 준비를 마친 뒤에는 내 주장을 얘기하기 보다는 상대에게 질문을 해서 상대방의 말로 사실을 답변하게 유도한다. 질문을 통해 감추고 싶었던 사실을 그들의 입을 통해 말하게 하고 질문에 대해 거짓말을 할 때는 증빙자료를 단호하게 보여주면 된다. 싸움은 생각과 논리를 통한 말싸움 보다는 상대를 벼랑 끝까지 몰고가는 잔인할 만큼의 사실과 증거의 나열이 승패를 가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위 방법으로 싸움을 해본적은 없다. 앞으로 계속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누군가 싸움을 걸어오면 일단 나는 차갑게 싸워보기로 생각한다.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문득 이 시간에도 억울한 패배를 당하지 않기 위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작은 조각의 사실이라도 처절하게 모으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