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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현 Jun 02. 2017

빨간 기와집

가와다 후미코 지음. 오근영 옮김. 꿈교출판사. 2014년.

  박근혜 정부는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문제에 관한 협상을 통해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고 선언했다. 피해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원망과 탄식 섞인 반대 입장에도 불구하고 양국 정부 간에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에 대해 한일 양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대사관 앞에는 위안부 소녀상이 설치되어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친일 수구세력들은 여전히 활개를 치며 이런 일련의 상황에 대해 과거사를 답습하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소녀상을 철거하라는 일본 정부의 요구에 대해 수용하려는 입장도 보인다. 그러나 국민들의 빗발치는 비난 여론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해 공식 사과도 없이 보상금 몇 푼 던져주고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고 선언하는 파렴치함을 보이고 있다. 과거 박정희 독재정권은 한일협정이라는 미명 아래 국민의 주권과 자존심을 팔아 사리사욕을 챙겼다. 과거 일제강점기에 잔학한 일제의 수탈정책에 편승하여 친일로 부를 누렸던 모리배들이 여전히 활개 치고 있는 상황이다.    


  책의 저자인 가와다 후미코는 일본인으로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문제를 직시하고 제국주의 일본이 자행한 인권유린에 대해 고발하고 있다. 이야기는 일본군 위안부가 된 여인 최봉기의 삶을 따라가며 성장기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더듬어가며 서술한다.     

     

  예전 가난한 집 딸은 어릴 때 여유 있는 집에 보냈다가 혼기가 차면 그 집 아들과 결혼시키는 풍습인 민며느리 제도가 있었다. 그렇게 그 집에 들어가면 애보개가 되거나 잔심부름을 하며 예비 시부모의 일을 도왔다. 결혼 적령기의 아들이 없어도 민며느리를 집에 들여서 친척 중 누군가에게 시집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딸을 보내는 부모는 입 하나를 덜게 되고, 민며느리를 들이는 집에서는 의식주만 해결해주면 공짜 노동력을 얻고 어릴 때부터 집안 풍습에 길들여 가풍에 맞는 며느리로 키울 수 있었다. 봉기는 일곱 살 때 처음으로 모르는 집에 맡겨졌지만 얼마 후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고 되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다른 농가로 보내졌다. 처음 간 집에는 며칠, 두 번째 집에는 반년 정도 있었다.     


  아버지가 일하는 집도 영세한 농가였다. 그 집 자체가 가족끼리 살기에도 좁을 정도로 작아서 아버지가 잘 방도 없었다. 아버지는 주인집이 아닌, 머슴들이 함께 지내는 방에 함께 지냈다. 봉기의 아버지는 가난한 소작농으로 가정을 꾸리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봉기의 어머니는 봉기가 여섯 살에 다른 사내와 눈이 맞아 집을 떠나버렸다. 봉기의 삶 자체가 한일합방 이후의 조선의 시대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도저히 딸과 함께 살 수가 없어서 봉기 할아버지 집에 맡겼는데 할아버지는 봉기를 마구 때렸다. 다음 집에 갈 때는 가마를 타고 정식 며느리로 갔다.     


  봉기는 아홉 살 때까지 야뇨증으로 자다가 오줌을 쌌고 시어머니는 봉기에게 옷도 주지 않아 젖은 옷으로 키를 뒤집어쓰고 소금을 얻으러 갔다. 반년도 못 견디고 그 집에서도 쫓겨났다. 9살이 되어 제갈 씨 성을 가진 집에 들어가 약 9년을 살고 열일곱 살에 박씨 성을 가진 서른 넘은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박씨 집안은 논밭을 조금 갖고 있어서 끼니 걱정은 없을 정도의 농가였다. 집안의 후계자는 형이었다. 봉기의 남편이 될 동생은 돈을 벌겠다며 타지로 나갔다가 형의 부름을 받고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혼담이 마무리되자마자 돈을 벌어 오겠다며 다시 어딘가로 떠났다. 봉기는 혼자 아주버니 집에 남겨졌다. 남편이 돌아온 것은 6개월 뒤였는데, 돈벌이를 하러 간다던 사람이 손에 쥔 돈 한 푼 없이 돌아왔다. 눈칫밥을 먹던 남편은 또다시 돈벌이하러 간다면 집을 떠나고 봉기는 다시 더부살이 신세가 되어 의식주를 아주버니 부부에게 의지해 살았다. 윗동서는 갈아입을 옷도 없이 시집온 봉기에게 베를 짜서 옷을 마련해 주었다. 아내를 혼자 팽개쳐 두고 돈을 벌어 오겠다던 남편은 1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그렇게 아주버님 식구들 틈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답답한 생활을 견디던 봉기는 이웃에서 부잣집 첩 노릇을 하던 친구의 꼬드김에 함께 마을을 떠났다.     


  집을 떠나도 살아가는 것은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함께 떠난 친구가 찾아들어간 여관 주인의 첩이 돼버리고 여관 노부부의 주선으로 근처 농가의 셋째 아들과 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상대는 어디에선가 흘러온 여자와 결혼했다가 갈라선 남자였다. 28세인 그는 농사지을 땅이 없어서 이웃 농가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봉기의 아버지와 같은 계층의 남자였다. 남의 집에 일하러 가듯 얼떨결에 시작한 결혼 생활이었지만, 남편이라는 사람이 봉기와 함께 살아가는 일에 진지했다면 아버지와 같은 계층의 남자인 그와 가난하게 사는 것도 견뎌 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당시 농가의 절반 정도가 춘궁 농가였다지만 그보다 더 곤궁해서 남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자의 가난은, 봉기의 부모에게 그랬듯, 남녀 한 쌍이 가정을 꾸리는 지극히 당연한 생활마저 할 수가 없었다. 봉기는 야무진 데라고는 없는 한심한 사내와 함께하는 생활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고 혼자 마을을 떠났다.    


  봉기가 찾아간 흥남은 신흥 공업 도시였다. 흥남은 일본 제국의 정책을 토대로 독점기업 하나가 만든 도시로서 비료나 화약 등을 생산해 중국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의 심장부로 만들어진 도시였다. 1926년 1월부터 조선수력발전주식회사,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신흥철도주식회사, 장진강수력발전주식회사 등이 차례로 건설되었고 부전강, 장진강을 막아 조성한 인공 호수인 부전호, 장진호가 만들어졌으며 흥남에서 두 호수를 향해 각각 철도가 부설되었다.     


  19세에 게으르고 한심한 남자와 함께하는 결혼 생활에 스스로 이별을 고하고 충청남도의 마을을 떠나 흥남에 흘러든 것이다. 1943년 늦가을, 흥남에서 낯선 남자가 봉기에게 말을 걸어왔다. 당시 ‘여자 소개꾼’이라 불리며 주로 군인과 손을 잡고 젊은 처녀의 소개 알선을 업으로 한 남자였을 것이다. 봉기는 29세가 되어 있었다. 여자 소개꾼의 그럴싸한 말에 넘어가 위안부 집단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남쪽에 일도 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고 그곳에는 산에 가서 나무 밑에 누워 입을 벌리고 있으면 바나나며 파인애플 같은 과일이 저절로 떨어진다고 했다. 봉기는 다른 모집된 여자들 틈에 섞여 흥남에서 경성 근처 마을로, 그리고 부산으로, 부산에서 일본 모지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다시 가고시마로 그리고 오키나와에 투입되었다.     


  봉기는 나하 서쪽으로 약 40킬로미터 해상에 해협을 끼고 작은 섬들이 군데군데 떠 있는 게라마 군도 중 하나인 도카시키 섬에 배치되었다. 당시 태평양전쟁 말기의 일본은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었다. 상황은 열악했고 전쟁상황에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와중에 군인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희생물로 위안부를 동원했고 동원된 사람들은 거의 조선의 여자들이었다. 14-5세의 어린 여자로부터 30세에 이르는 여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잡혀서 끌려왔거나 감언이설에 속아 팔려왔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서 군인들의 성 접대를 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봉기와 다른 위안부들이 거처했던 빨간 기와집은 위안소였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군인이나 민간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전쟁의 희생물이 되는 상황이었다.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집중포화가 터지는 속에서 많은 이들이 속절없이 죽어가는 가운데 위안부들도 하나둘 죽어갔다. 더러는 병들어 죽고, 더러는 자결하기도 하고, 더러는 징집된 인부들과 함께 탈출해 미군에 투항하기도 했다. 결국 일본은 항복했고 전쟁은 끝이 났다. 그 와중에 봉기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봉기의 삶은 위안부로 살았던 시간보다 혹독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굶주림과 끝없는 육체의 고통, 두통과 전쟁 후유증,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에 버려진 채로 생을 이어가야만 하는 고독이었다. 전후 조선은 남과 북으로 갈라졌고 그를 데려간 일본으로부터 버려지고, 미군의 전쟁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났지만 갈 곳이 없는 떠돌이가 되었다.     


  1991년 10월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봉기의 삶은 그야말로 험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전 위안부’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욕구마저 채우지 못한 채 나라 잃은 백성의 한과 슬픔을 간직한 채 이국땅에서 죽어간 것이다. [빨간 기와집]은 과장 없이, 꾸밈도 없이 봉기 씨의 고지식할 정도로 솔직한 증언에 힘입어 만든 작품이라고 작가는 밝힌다.     


  봉기 씨는 ‘전 위안부’ 최초의 증언자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1944년 가을 도카시키 섬으로 끌려온 봉기 씨는 패전 후 일본에서 잘려 나간 오키나와에서 아메리카 세상이라 불리던 시대를 살았는데, 1972년에 오키나와가 일본 땅으로 복귀되자 불법체류자 취급을 받고 강제퇴거 대상이 되었다. 3년의 유예기간 안에 신청하면 특별 체류 허가를 내주는 조치가 취해져 봉기 씨는 그것을 신청했다. 그래서 출입국관리사무소 담당관의 취조를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위안부로 끌려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빨간 기와집]은 1987년에 출간되었다. 봉기 씨는 그토록 더운 오키나와의 여름에도 덧문까지 꼭 닫고서 사람을 피해 살았다. 견디기 어려운 두통이 엄습해 시달리다가, 파스를 잘게 자르는 가위로 목을 찌르고 싶다며 자기 인생을 저주했다.     


  작가는 봉기의 고향인 신례원을 찾아 봉기의 언니인 봉선을 찾지만 서로 만날 수 없는 여러 정황으로 아픈 과거만 들먹이게 된 결과를 보며 그 시대를 산 자들의 아픔의 민낯을 보여준다.  봉기와 함께 위안부로 끌려온 이들 몇몇에 대한 추적과 후기들을 통해 다른 여타 위안부들의 삶의 정황들을 돌아보게 한다. [빨간 기와집]을 통해 우선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인지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압제한 자들의 책임은 무엇인지, 국가가 고통받았던 국민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한일 양국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지 등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새롭게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서 정리할 것인지 기대하며 먹먹한 가슴으로 고난의 시대를 살아온 조상들의 아픔을 되새겨 본다. 오늘도 여전히 외세에 의존해 사리사욕만 추구하는 매국 모리배들이 설치는 모습을 보며 적폐 청산을 위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는 마음으로 엎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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