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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현 Jan 16. 2018

시작

무엇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할 것이 보이지 않았다. 날씨는 왜 이리 우중충하냐고 애꿎은 잿빛 하늘만 탓했다. 속살에 켜켜이 쌓인 해묵은 상념들이 수시로 고개를 디밀고 소리쳤다. 가지런히 말끔하게 정리해야 할 것은 주변 상황이 아니라 저 깊은 속에 있었던 것이다. 다듬이돌로 꾹꾹 눌러두었던 그 케케묵은 오가리 속 묵은지처럼 가슴 밑바닥 한구석에 눌러두었던 상념들이 나 아직 안 죽었다고 소리치고 있다. 딱히 해야 할 일도 생각나지 않는데 마음은 조급히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채근하고 있다. 까닭 없이 발걸음이 빨라지고 수시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갈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발걸음은 분주하고 향방 없는 걸음걸이는 그대로 갈지자다. 아무리 어둠이 깊어도 동은 튼다. 살갗을 파고드는 한기에 움츠린 어깨 위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눈에 보이진 않아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침 햇살은 뭔가를 하라고 한다. 눈이 부시다. 새하얀 숲의 아침은 반짝반짝 윤기가 흐르고 새들의 우짖는 소리는 평온하기만 하다. 하나씩 꺼내 들고 만지작거리는 손의 감촉이 간지럽다. 얼어붙은 대지처럼 죽은 듯 엎드려 있던 가슴속 저 밑바닥에서부터 속살거리듯 나지막한 소리가 올라온다. 그래 시작해보는 게야. 한걸음을 떼는 데 몇십 년 세월이 걸렸지만 그 시작은 충분히 아름답다. 오래도록 소리쳤을 그 소리가 이제야 귀에 울렸다는 게 신기하기만 한 아침이다. 하늘과 바람과 햇살... 그리고 겨울의 나목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싱그런 아침을 합창하고 있다. 첫걸음을 뗀 어린아이의 걸음마는 축복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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