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든 평일이든 분별없이 일하다 보니 요일 감각이 흐려졌다. 쉬는 날마저 평일에 위치하고 있어, 아직 나만의 루틴이 확실히 정립되지 않은 요즘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며 지내왔다. 다행히 발전한 각종 기술들과 내가 가진 장비들에 의지할 수 있는 덕분에 일정을 무리 없이 잘 소화해 내고 있고, 스트레스 또한 크게 받지 않으며 살고 있다. 매일 보는 핸드폰에는 나의 출근 일자와 시간이 동기화된 달력이 가장 먼저 표시되고, 매 출근 세 시간 전에는 손목에 있는 디지털시계가 나만의 개인 비서처럼 출근 시간을 일러준다. 바쁘지만, 나 혼자서도 운영할 수 있는 나의 하루가 매일 반복되고 있다. 이렇게 매번 기술의 도움을 얻어 가는 나는 항상 그 기술에 감사하면서, 그 기술에 대한 발명이나 발견을 이룬 사람들에 대해 경외감을 느낀다. 이제는 익숙해지고, 없으면 불편해서 안 될 만큼 편해진 것들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걸 처음 생각해낸 걸까?
어제는 평일이었다. 아무리 요일 감각이 흐려졌어도 어제가 평일이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을 만큼 여유로운 날이었다. 평일의 서울은, 특히나 내가 출근하는 홍대 근처는 생각보다 여유롭다. 뭐 이것도 나름의 기준 차이일 수도 있겠다. 매일 같이 사람이 몰리는 9번 출구 앞을 생각하면, 홍대와 여유라는 단어의 조합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설게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주말의 홍대를 매번 경험하고 있는 내게 평일의 홍대는 비교적 한갓지고, 어떨 땐 적막하다고 느낄만하다. 근데 어제는 달랐다. 출근길 버스를 타고 오며 여유로운 홍대입구역의 모습을 생각하던 나는 버스가 다 도착해갈 즈음, 너무나도 많은 인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뿔싸, 요일만 목요일이지 오늘은 빨간 날이었구나.' 제4356주년 개천절을 맞아 전국 모든 사람들이 홍대에 몰린 듯했다. 근데 왜 모여도 하필 홍대에서 모일까? 개천절이라면 강화도나 백두산에서 모여야 하는 게 아닌가? 거긴 너무 멀어서 가까운 홍대로 온 건가?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며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조금은 징그럽다는 생각을 했다. 차가 지나다니지 못할 만큼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있는 공간을 보며 그들의 머릿수를 헤아려보기도 하고, 그들의 머릿수를 헤아려보다가 이질감이 드는 너무나도 많은 머리통들이 보여 알 수 없는 감정들도 들었다. 까맣게 몰린 사람들은 어릴 적 열심히 땅바닥을 보며 유심히 관찰했던 개미 떼 같기도 했고, 다큐 영상에서만 보던 깊은 바닷속에 사는 대규모의 물고기 떼 같기도 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아침에 조금 우울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미묘한 감정이 들어 한 가지 생각이 솟구쳤다. '이 사람들도 전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겠구나.'라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은 아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했던 생각을, 들었던 감정을, 해봤던 경험을 이미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마다 환경은 달라도 저마다 싸워나가고 있을, 혹은 싸워내온 자신만의 전쟁터가 있을 텐데와 같은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환하게 웃고 있는 저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나도 환하게 웃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들 자신만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저 자리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나라고 못할쏘냐. 다른 사람들의 말 못 할 아픔도 있음을 생각해 보면, 내 아픔만이 대수냐.
나는 남들을 돕는 걸 좋아한다.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굳이 내게 큰 손해가 없다면 잘해오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내가 굳이 불편하지 않은 일로 하여금 전체의 행복이 추가될 수 있는 일이기에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느꼈다. 요즘은 학원에서 학생들을 상담하며, 매장에서 고객들을 응대하며 나로 인해 놀라고 얻어 가는 게 있는 그들을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 그런데 이런 성격이 이타적인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쉽게도 난 아직은 충분히 이타적이지 않은 사람인 것 같다. 최근에 불쑥 든 생각이지만, 이타적인 사람이 되려면 우선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정말 이율배반적인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남을 위하고 베풀 줄 아는 사람은, 우선 본인을 위하고 본인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짤막하게나마 내게 쓰는 편지를 써보고 깨달았다.
난 여태까지 내 주변에 많은 사람들에게는 진심을 다해서 편지를 써왔으면서, 정작 나 스스로에게는 한 번도 진심을 다해 얘기해 준 적이 없었다. 네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그런 말들을 아마 글을 쓰며 처음 해봤던 것 같다. 여태까지 남들에게는 그렇게 셀 수 없이 잦게 해 왔던 이해와 지지의 말들을 뒤늦게서야 겨우 짤막한 몇 줄로 내게 처음 해준 것이다. 사람이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와 지지를 전달할 수 있기 위해선 사람 자체에 대한 충분한 경험과 생각들이 필요할 텐데, 그러한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대상은 나 자신이었다. 스스로가 원하는 걸 파악해 주고, 스스로가 힘든 점을 파악해 주면서 스스로에 대한 응원과 따뜻한 관심이 우선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일단 나한테 잘해줘야, 남한테도 잘할 수 있다. 그리고 나한테 모질지 않아야, 남에게도 모질지 않을 수 있다.
기술이나 의학의 발전도 마찬가지 아닐까?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다. 우리가 누리는 수많은 발명과 발견들은 대부분, 처음엔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일종의 불편에 의해서일 수도, 혹은 더 나은 환경에 대한 욕심에 의해서일 수도 있다. 또는 발명한 본인의 필요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필요로 인해 그 발명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아니면, 발명이 이루어진 후에 다른 사람들의 수요가 생겨났을 수도 있다. 발명한 사람은 자신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과 욕심에 찬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고, 새로운 이익을 챙기려고 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과정들은 결국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되었을지라도, 이 또한 발명이 어느 누군가의 이기심에서 시작되어 많은 다른 사람들을 돕게 되는 이타심으로 발전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내 생각만이 무조건 옳지는 않다. 내가 느끼는 아픔이 남들의 아픔보다 무조건 크지는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선 이기적이어야 한다. 내 생각을 들어주고, 내 아픔에 공감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남의 생각을 들을 수 있고, 남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여태까지 나는 이기적이지 않은 채로 남들에게 많은 공감과 지지를 말해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모두 진심이 아니었거나, 헛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는 조금 더 이기적일 수 있게 된 나는, 앞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더 넓어진 이해심과 더 높아진 자존감을 바탕으로 그들의 마음을 더 깊게 안아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자명한 사실이다. 매번 그걸 증명해주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