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하루에 적어도 두 시간은 지하철에서 보내는 것 같다. 출퇴근길의 지하철은 항상 오묘하여 알 수 없다. 스케줄 근무로 출근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어느 날은 꽉 들어찬 지하철 칸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갈 때도 있고, 가끔은 텅텅 빈 지하철에 여유롭게 몸을 뉘일 때도 있다. 목적지까지 약 50분 정도를 환승 없이 가는 길이기에, 매번 집을 나설 때마다 이번엔 꼭 앉아서 가고 싶다는 하찮은 희망을 가지곤 한다. 그러다 막상 빈자리가 없는 열차가 내 앞으로 들어오는 걸 볼 때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따지고 보면 자리가 있었던 경우가 더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열차를 기다리는 순간만큼은 복권을 쥔 채 토요일만 기다리는 사람처럼 목을 빼놓고 들어오는 열차를 째려본다.
이젠 어느 정도 자리에 앉는 요령도 생겼다. 앉아있는 사람들을 흘깃거리다 보면 짐을 챙기거나, 역을 확인하는 등, 곧 내릴 것 같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행동들이 눈에 띈다. 그러면 슬며시 마음속에 다시금 한 줄기 희망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타고 내리는 특정 환승역을 지날 때면 나의 레이더는 바쁘게 돌아가기 일쑤다.
사실 앉는다고 해서 그렇게 바라던 만큼 자리가 안락하진 않다. 물론, 내내 서서 가는 것에 비하면 한결 몸이 편하고, 정말 피곤할 때면 잠깐 내 가방에 기대어 잠을 청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에 비해 덩치가 작지 않은 내게 지하철 좌석은 조금은 끼기도 하고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눈치도 가끔은 보여 마음이 불편할 때도 적지 않게 있다. 특히 내 앞에 서있는 사람이 나이가 지긋하신 노인분이시라면, 도저히 못 본 체하며 눈을 감아버리거나 억지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뚫어져라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는 등의 행동은 할 수 없게 된다. 핸드폰 옆으로 보이는 손의 주름을 확인한 순간, 자연스럽게 내 눈은 그분의 자글자글한 얼굴, 혹은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로 향하게 된다. 이후엔 뭐 별생각 없었다는 듯 일어나곤 한다.
생각이 많은 나는 자리를 양보해 드릴 때도 굉장히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데, 여타 사람들처럼 "여기 앉으세요."하고 자리를 양보해 드리는 게 이상하게 부끄러울 때가 많다. 왜인지는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 말이 자리를 비켜드리는 걸 생색내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양보받으신 분께서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며 다시 나를 앉히려고 할 때의 그 난처함이 싫어서 그런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그 말을 전해드리기가 지금의 나는 굉장히 부끄럽고, 불편하다. 그래서 요즘은 그냥 얼굴을 확인하곤, 아무런 말 없이 일어난다. 마치 다음 역에 내려야 하는 사람인 것마냥 일어나서 몇 걸음을 일부러 걸어가곤 한다. 남눈치가 아직도 그렇게 신경 쓰이나 보다. 괜히 내가 앉았던 자리가 더 이상 꼴도 보기 싫어진 사람처럼 멀찍이 거리를 두고, 다시 남은 몇 정거장을 그렇게 서서 간다.
이것도 선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양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선행의 범주로 들어가기엔 마음이 조금 불편할 정도로 좋은 의도에서 내 행동이 발현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나이 많은 어르신을 앞에 두고 좀 더 건장한 내가 아무렇지 않은 듯 앉아서 간다는 것이 불편해서 양보를 해드렸다고 생각이 든다. 물론, 그분들을 이해하는 마음에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교양적인 차원에서 내 행동을 바라보자니 불편해서 그랬다는 감정이 앞선다. 당연히 남눈치가 신경 쓰이는 것도 한 몫을 한다. 그래서 뭔가 양보를 했음에도 조금은 수줍은 느낌이 드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줍음을 타는 걸 두려워해서일까, 일부러 무심한 듯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내어드리는 게 이상하게 보이지만 편하다.
양보해드리면 기분은 좋다. 퍽 웃긴 건, 좋은 일을 해서 기분이 좋다기보다는, 좋은 일을 했다는 그 자체에 대해서 기분이 좋다는 점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좋은 일을 '적립'했다는 기분이 들어서일까. 꽤나 순수하지 않은 의도로 기분이 좋기 때문에 선행이라고 하는 범주에 나의 양보를 넣기 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적립이라면, 말 그대로 나중에 어떤 방향으로든 돌려받길 원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내 생각도 그렇다. 자리를 양보하거나, 남들을 도와주면, 어떤 방식으로든 오늘 하루에 좋은 일이 돌아올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무언가를 바라고 하는 행동이 진짜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선한 행동들과 같은 범주로 들어갈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내 행동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진정으로 선한 의도라고 하는 것들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에 매번 물음표가 남는다.
나는 착한 사람일까? 나는 어려서부터 신기할 만큼 내 행동에 따른 대가가 빨리 왔다. 미신적인 생각일 수도 있고, 워낙 의미부여를 잘하는 내 터무니없는 생각일 수 있겠지만, 선행을 하면 이상하게 기분 좋은 일들이 주변에 많아졌고, 남몰래 악행을 저지르면 놀라울 만큼 다른 곳에서 불운이 따랐다. 물론, 독립적인 사건들이기에 연관점은 전혀 없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겪은 이런 경험들 때문에 선행을 적립하려는 마음가짐이 자연스레 생겨난 것 같다. 그래서 웬만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는 행동들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내 하찮은 행동이 누군가에게 얼마간의 기쁨을 줄 수 있다면 내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기꺼이 그것들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것들에 대해서 다 돌려받았나 생각해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래도 그냥 여태까지의 경험상 내 마음이 내켜서 어쩔 수 없이 그것들을 해냈던 것 같다.
선행의 기준은 뭘까? 아니, 착하다는 것에 대한 기준이 무엇일까? 내 기준에서는 착한 행동이라고 해서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착한 행동이라고 적용되진 않을 것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이해관계가 다각화된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내 선한 의도가 누군가에겐 독이 되어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면 뜻하지 않게 내게 앙심을 품는 사람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마냥 마음이 여린 사람이 선한 사람일까? 그것도 동의할 수 없다. 마음이 여려서 남들한테 해야 할 말도 못 하는 사람이라면, 본인 스스로에게 착하지 못한 사람이다. 착한 사람 증후군을 앓는 사람처럼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어디선가 본 글에서 말하기를, 비행기 사고 시 안전 수칙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사고 시 보호장구가 천장에서 떨어지면 보호자가 먼저 착용하고, 그 다음에 아이를 착용시키세요.' 부모라면 응당 자신보다 아이를 먼저 챙기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저런 수칙이 생겼다는 것은, 일단 보호자가 안전해야 아이도 안전할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일 것이다. 보호장구를 착용하지 않은 채 불안함에 떨고 있는 부모는, 본인의 아이를 지키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남을 먼저 생각하다가, 둘 다 위험에 빠지게 되어버릴 것이다.
요즘 느낀 건, 남의 선행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배려를 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남이 베푼 배려를 알아채줄 수 있는 사람, 마음이 여린 사람을 악한 사람들로부터 지켜주고 자존감을 세워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선행을 목격했을 때 낯설지만 기꺼이 칭찬해주며 그들에게 힘을 북돋아줄 수 있는 사람이 착한 사람들이 아닐까. 그리고 남들에게 그렇게 해주는 만큼 본인에게도 배려할 줄 알고, 스스로의 자존감을 세울 줄 알기에 남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있을 테고, 그 덕분에 남들의 선행까지도 눈에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며칠 전 친구와 서울로 나들이를 갔다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운이 좋게 자리에 앉은 우리는 신나게 떠들며 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몇 정거장 안 되어 중년의 부부가 우리 앞으로 오셨다. 잠깐의 고민을 하다가 나는 자리를 비켜드렸고, 내 친구 또한 내 행동을 빠르게 알아채고 자연스럽게 아무런 말 없이 건너편에 함께 서서 남은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내가 먼저 내릴 때가 되어 작별인사를 하는 순간, 자리를 양보받아 앉아계시던 아주머니께서 사탕을 꺼내주시며 이렇게 말하셨다. "나는 둘 다 내리는 줄 알았는데, 양보해줘서 고마워요. 그쪽들도 힘들고 다리 아플 텐데" 이 얘기를 듣고 순간 벙쪄있다가 얼른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내렸다.
착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 그리고 동화의 엔딩처럼 그들이 결국엔 매번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와 함께 했던 내 친구도, 사탕을 급히 손에 쥐어주시던 한 아주머니도, 매일 감사함을 잃지 않고 사시던 우리 어머니도 모두 착한 사람이다. 그들의 착함을 알아보는 나도 착한 사람일까?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고민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착하다고 하기엔 종종 나오는 짓궂은 악한 생각들이 내 발목을 잡는다. 나는 나를 착한 사람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