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가치를 긍정한다. 아니, 어쩌면 나는 예전부터 변화를 갈구해 왔고, 그에 따른 결과를 사랑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내가 모른다고 표현한 이유는, 여태까지의 내가 대체적으로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난히 변화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어했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3·1절 바로 다음에 붙어있는 개학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1년간 적응했던 반친구들과 헤어지고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름도 모르고 성격도 모를 새로운 친구들과 다시 1년간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 내겐 너무나도 버거웠던 것 같다. 본래 워낙에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 일어나지도 않을 불행들까지 거기에 덕지덕지 붙어버리니, 3월의 첫날은 항상 온 기운이 빠진 채로 다음 날을 걱정하는 데에 희생되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교사라는 꿈을 가지게 된 것도 어떠한 걱정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직장이기 때문이었고, 그 꿈을 포기한 것도 당시의 내가 아무 걱정 없이 공부를 할 만큼 "안정적"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통제적인 성격이 강했던 나는 안정감이 주는 그 안락함 속에서 꿈을 꾸고 싶었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으며,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싶어 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들 아래서 나의 삶은 마치 매번 해왔던 훈련을 진행하는 군인들마냥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통해 방어율 100%에 이르는 차단선을 구축하는 것을 꿈꿔왔었다. 이 선은 한 번이라도 뚫리면 안 되는 나만의 성역이자,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금지구역이었다.
행운이었던 건, 나의 이 차단선이 구축된 지 얼마 안 되어 마구마구 짓밟혔다는 것이다. 앞서 썼던 글에도 나와있지만, 나의 이런 고지식한 생각들이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의 인생은 곧바로 격정과 상실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나의 유일한 기둥이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일하던 직장은 급작스럽게 폐업했으며, 가족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호시탐탐 내가 가진 것들을 노리다가 소송을 걸어왔다. 지도도 없는 황무지의 한가운데에 차단선을 구축한 나의 쓰라린 패배였으며, 처음에는 그 절망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인생이 꼬인 것 같고, 세상이 날 버린 것 같고, 이만한 불행이 연속적으로 찾아왔다는 사실이 미웠다, 당시에는.
그런데 내가 위에서 행운이라고 표현했던가? 지나고 난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그 당시에 경험했던 일들은 환희의 실패였던 것 같다. 황무지에 차단선을 세워보고 나니, 그 일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은 지역에서는 내가 어떤 곳에 선을 그려야 할지, 어디서 언제 누가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당연하게도 앞으로 남은 일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를 것이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의 나날들은 황무지의 연속일 것이다. 당장 오늘부터라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차단선을 집어던져버리기로 했다. 촘촘한 그 선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고, 지금은 오히려 그 선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차단한다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내 발목에 쓸데없는 족쇄를 채워놨던 것이었다.
변화를 긍정하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리고 꽤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긍정에 대한 확신을 더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쉽지만은 않은 일이지만. 아울러 든 생각은, 사람을 바꾸는 것은 본인 스스로만 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이전에는 나와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서 보고 배운다면 인생이 바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좋은 인품에 대해 갈구하며 동경받는 대상들의 시간에 대해 탐구했다. 자기 계발 서적들이나 영상들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억지로 꾸역꾸역 봤었던 적도 있었다. 결과는? 이전과 같았다. 나에게 늘어난 인덕이라곤 후덕한 뱃살 밖엔 없었으며, 동경받는 그들의 시간 관리 능력에 비하면 지금 나의 위치는 아직도 게으른 베짱이 수준이다.
나는 항상 배움의 가치를 긍정하는 사람이기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고 배울 만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는 것도 굳게 믿었다. 마냥 옳지 않은 생각만은 아니지만, 약간의 오만함도 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꿈꾸며 잠깐이나마 학교와 학원에서 교단에 나아갔을 때도 나는 학생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고, 내가 겪었던 많은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대하며 그들의 부족한 모습을 바꾸려 했다. 또 운이 좋게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져 연애를 했을 때도 나는 그 사람을 도와주며 같이 성장하자는 명목 하에 많은 조언을 해주는 길라잡이 역할을 자처했고, 많은 진심을 표하며 그 사람의 부족한 모습을 바꾸려 했다. 결과는? 둘 다 같았다. 그들은 이제 내 주변에 없으며,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었다.
이 처참한 실패는 과연 어떤 이유에 따른 결과인 걸까? 근데, 과연 이게 실패는 맞을까? 언젠가 TV에서 어떤 유명인이 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인생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는 게 아닌, 성공과 과정만 있을 뿐이라고. 실패라는 선택지는 없다. 변화라는 행위가 지금 실행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단지 실패라는 과정 속에서 잠시 머물러 있을 뿐인 것이지, 그곳이 변화의 종착지는 아니다. 어느 날 나는 그저 남이 쓴 책이나 몇 장 읽고, 남이 만든 영상이나 몇 분 감상하다가 잠깐의 감성에 젖어 채 일주일도 가지 않을 무른 의지를 다지곤 했다. 또 어느 날 나는 손을 내밀어주겠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손을 잡고 "이건 이래서 마땅하다", "저건 저래서 당연히 안 된다"라는 말들로 나의 알량한 줏대를 상대에게 강요하며 상대의 모습을 바꾸려 했다.
결국 여기서 드러난 건, 애초에 내가 생각을 잘못했다는 것이다. 내가 바뀌지 않았던 건, 나의 과정을 남들의 과정과 동일시한 것이고, 남이 바뀌지 않았던 건, 남의 과정을 마치 나의 과정인 것마냥 굴었다는 것이다. 나는 좀 더 인내심을 가졌어야 했다. 남이 바뀐 결과만을 생각하며 나의 결과를 재촉할 것이 아니라 나를 바꿀 수 있는 과정을 좀 더 멀리서 차분히 지켜보며 깨달아야 했고, 급격한 변화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작은 변화의 날갯짓으로부터 일으킬 수 있는 큰 변화의 소용돌이를 기대하며 하찮은 일에 집중했어야 했다.
나는 남들의 과정에 탐을 냈으면 안 됐다. 그들을 진정으로 위한 것이었다면 이 또한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이 변화할 수 있는 그들만의 과정을 응원해주고, 그 과정의 기다림 속에서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해야 했을 것이다. 설령 변화 이후의 내가 원하는 모습과 그들이 원하는 모습이 같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과정은 그들 스스로 정하는 것이고 혼자서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내가 변화하길 원한다면, 남을 보고 그것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않아야 한다. 남이 변화하길 원한다면, 내가 보고 그것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만약 변화라는 행위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사람의 기질 자체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생긴 대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아마 모든 인간이 그렇게 살아왔다면 아마 우리는 급변하는 환경과 온갖 위협들 속에서 이미 멸종하고 말았을 것이다.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그렇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질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성격의 변화를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질을 조절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례로 나는 굉장히 걱정이 많은 기질을 타고났다. 우리 할머니께서 그러셨고, 그걸 난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수많은 걱정들에 짓눌려 불행한가? 뭐, 한때는 그랬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을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을 만들어서 하기보다는,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눈앞의 광경에서 곧바로 대처할 수 있을 일들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 기대하고 있다. 적어도 앞으로의 나는, 남들보다 빨리 강을 건널 수는 없어도, 깨진 돌다리에 헛디뎌 빠져 물살에 휩쓸려 가진 않을 것이다. 난 이렇게 많이 변했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더 새로워질 것이다. 만약 본인이 변화를 부정한다면, 생각해 보라. 정말 당신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단 1년 전의 오늘과 변한 게 하나도 없는가?
다시 한번 생각하건대, 인생은 황무지의 연속이다. 우리 앞에 남은 날들은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 한 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속에 긋기 쉬운 가상의 선을 그리기보다는, 어렵지만 침착하게 지도를 그려나가야 한다. 선은 내 맘대로 이리저리 그려버리면 그만이지만, 지도는 정확하고 세밀하게 그려내야 하기 때문에 비교적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지금 실제로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기보다는,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보이는 굵직굵직한 선들을 새겨야 할 것이다.
너무 멀리 보려 하지는 말자. 또 너무 세세하게 예상하지는 말자. 굵직한 선 몇 개를 그려놓고 직접 그 길을 걷는다면, 나머지 세세한 부분들은 걸어온 나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자연히 채워지게 될 것이다. 거기서 채워지는 세세한 부분들이 변화가 아닐까? 이렇게 얘기하는 나도 아직은 변화가 두렵다. 변화가 찾아오고 나서야 평화가 있음을 알기에 이제는 간절히 기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