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엄마라는환상
흔히 ‘엄마’라는 단어 안에는 사회가 만들어낸 환상이 깃들어 있다. 이 환상은 환상적이지 않게도,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폭력적일 때가 있다.
아이를 위해 일상과 일터에서 고군분투하는 엄마에게 “엄마는 강해. 엄마니까 응당 그래야지.”라고 굳이 덧붙이거나, 엇나가는 아이를 보며 “그건 엄마가 잘못 대처해서야.”라고 쉽게 단정 짓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엄마에 대해 하나의 기준을 들이밀거나 쉽게 짐작하며 판단하는 마음은 가벼워서 휴대하기 더 용이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씁쓸하지만 나 또한 이런 폭력의 가해자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폭력을 휘두르게 되는 대상은 마음 아프게도 스스로의 엄마다.
엄마의 하루를 빽빽하게 채우는 일들을 당연히 엄마의 일로 생각했던 것,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의 원인을 엄마의 교육 속에서 찾았던 것. 사실 집안일은 당연한 엄마의 일이 아니었고, 내가 인정하기 싫어했던 내 모습은 그저 나의 선천적인 기질에서 기인했다. 내가 엄마를 걸고넘어졌던 것은 그저 그 방식이 내게 편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엄마가 되니 조금은 알겠다. 모든 엄마들은 엄마 이전에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엄마라는 역할도 처음이고. ‘엄마’라는 타이틀이 생겼다고 하루아침에 마땅히 모든 것을 잘하고, 모든 것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는 없다. 나는 굳이 그렇게 되고 싶지 않고.
#엄마의공허함
아기는 사랑스럽다. 이 작은 존재의 생명 에너지는 주변을 춤추게 한다. 하지만 정작 아이의 엄마에게는 이런 순간이 공허함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우주가 생기고 나의 역할 중 ‘우주의 엄마’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게 기분 나쁜 건 아니다. 다만 내 주변 모두에게 그렇게 비친다면 꽤나 우울할 것 같다는 마음이 자주 든다.
다행히 나를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라 나 자체로 봐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나와 우주를 분리해서 생각해주는 사람은 단연 우리 엄마다. 내 눈먼 편견의 피해자가 오히려 고유의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요즘 뭐 먹고 사니?”
엄마의 질문에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대답했다.
“우주, 요즘 이유식 두 끼랑 유아식 한 끼 먹이지.”
“아니 우주 말고 너는 뭐 먹고 사냐고.”
그 말 한마디가 나를 공허함에서 꺼내 준다.
#(존)중(소)중
삼 남매를 키워낸 엄마지만 나에게 육아에 대해 조언을 한 적은 없다. ‘엄마의 육아’와 ‘나의 육아’가 다르다는 것, 그 차이에서 오는 독립성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그저 엄마는 내 마음이 조급해지면 말해준다, “괜찮아.”라고. 그리고 우는 우주에게는 덧붙인다, “우주야 괜찮지 않아도 돼.” 엄마의 존중이 담긴 말 덕에, 마음만은 편안한 육아를 하게 된 것 같다.
엄마는 사진을 찍자고 하면 늘 손사래를 쳤다. 카메라 한 대가 시야에 추가됐을 뿐이지만 표정은 이내 어색해진다. 우주가 태어나고도 일명 카메라 낯가림이 갑자기 풀릴 리 없었다.
“우주만 찍어줘. 난 괜찮아.”
우리 엄마랑 우리 딸을 함께 담고 싶었던 마음에 나는 말했다.
“엄마, 우주가 이 사이즈에 이 모습인 건 오늘뿐이야. 우주의 단 한번뿐인 오늘과 함께 사진을 찍자.”
그러자 엄마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엄마, 사실 엄마의 오늘도 오늘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