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언어, 34개월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계절이 있다. 유난히 설레 기다려지고 일 년을 버틸 힘을 주는 충전의 계절. 그 계절이 내겐 하필 가을이다. 가을로 말할 것 같으면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데다가 잠시 한 눈 팔면 이미 가버리고 없는 짧디 짧은 계절이 아닌가. 여름인 것 같은데 가을인, 겨울인 것 같은데 가을인 일명 디졸브 기간을 제외하고 온전한 가을이 며칠이나 될까. 일 년에 허락된 그 짧은 기간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몸도 마음도 긴장한다.
내가 짧은 가을을 들이마시는 방법은 딱히 특별할 것은 없다. 일단 하늘을 더 자주 본다. 낮 시간 가을 하늘은 특유의 청명함 때문에 말문이 막히지만 역시 진면목은 해 질 녘이다. 매일매일 다른 색으로 물드는 이 시기 하늘은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다. 사진으로는 절대 같은 색을 담을 수 없어 지금 내 눈으로만 제대로 볼 수 있는 그 희소한 가치가 가을 하늘을 더 소중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하늘 아래의 시간은 유난히 바람도 시원하다. 지겨운 더위를 오랜 시간 지치도록 겪은 후여서인지 바람이 이렇게 친절하게 느껴질 수 없다. 바람이 만들어내는 가을의 향은 어떤가. 하늘, 바람, 공기의 삼박자가 만들어내는 이 계절의 정취는 언어의 한계에 맞닥들인 게 한다.
눈 깜짝할 새에 증발되는 궁극의 아름다움만이 내가 가을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니다. 가을은 곧 나에게 의미의 축제다. 나도 딸 우주도 모두 공교롭게도 가을에 태어났으니까. 우주가 태어나기 전까지 가을은 내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다는 것을 가장 뚜렷하게 각인시켜 온 역사가 축적된 계절이었다. 사랑과 응원의 조각을 모으는 기간이자, 앞으로의 일 년을 살아갈 힘을 얻는 시기였다. 가을은 내게 작은 축제이자 마음의 풍요였다. 그리고 몇 년 전 우주가 태어나면서는 가을 동안 사랑의 방향성이 달라졌다. 내가 이제껏 처음 느껴보는 새로운 형태의, 거기다가 부피가 어마어마한 사랑을 주는 계절이 된 것이다. 우주는 내 생일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태어났다. 나는 생일에 받은 사랑을 고이 접어 우주에게 주었다. 사랑은 주는 것으로 완성이 되는지 더 큰 기쁨이 되었다. 고로 내게 가을은 곧 사랑이다.
우주가 말을 잘하게 된 지는 오래되어 이제는 우주의 언어로 쉽사리 놀라지는 않는다. 물론 가끔씩 튀어나오는 아줌마 말투나 행동은 여전히 놀랄 만큼 귀엽기는 하지만. 오늘 아침 우주와 어린이집에 가는 길, 여느 날과 같이 우주와 수다를 떨었다. 이야깃거리야 늘 비슷하다. 지나가는 언니가 킥보드를 잘 탄다던지, 반 친구들이랑 어떤 놀이를 해야겠다던지, 지렁이를 밟지 않게 조심하라던지. 그런데 오늘 우리 모녀는 가을을 마중 나왔다.
물론 가을의 정취에 먼저 빠진 이는 나다.
“가을 하늘은 빠짐없이 챙겨봐야 해. “
“바람도 이미 가을 같다. “
성큼 다가온 가을을 우주도 놓치지 않았으면 해서 시시콜콜한 말에 가을을 담는다. 내 말을 듣다가 우주가 입을 연다. 아마 그녀가 하는 말이 가을이라고 알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나무니피 울어.”
나뭇잎이 운다니 무슨 말이지 하는데, 이르게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한 말이었다. 우주는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이 떨어지는 눈물 같았나 보다. 그런데 나무가 우는 게 아니라 나뭇잎이 운다고 하다니. 온몸으로 우는 잎이라 생각한 건가? 생각이 생각을 낳자 우주가 뱉었을 때의 신선함은 퇴색된다. 열거된 몇 줄의 글보다 한 줄이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을 때가 있다. 길게 풀어 더 자세히 설명하려고 할 때 오히려 그 의미나 매력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 많은 것들의 정수를 최소한의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 시인 아닐까. 우주는 오늘 꼬마 시인이었다. 앞으로 우주가 어떤 표현을 해줄지 기대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