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

by 함사람


좋아하고 자주 쓰는 그릇이 깨졌다. 선반에 불안정하게 올려뒀을 때부터 깨질 구실을 만들어 둔 걸 지도. 사람들은 종종 그릇이 깨지면 불안해한다. 꿈에서 이가 빠지면 흉몽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그릇이 깨지면 불운의 징조라고 생각한다. 미신이다.


대학생 때였다. 그날도 야작을 하는 날이었는데 그림은 풀리지 않고 친구를 보니 역시 마음처럼 안 되는 모습이었다. 축 처진 어깨를 이끌고 몰래 다가가 말을 걸었다.

“운아, 뭐 해?” 하고 뒤에 붙는 말줄임표. “운아, 접시 하나 가져와 봐. 버리는 거로, 네가 버리고 싶은 거” 우리는 작은 접시 하나씩 갖고 예술관 옥상으로 올라갔다. 달밤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너 한번 나 한 번 접시를 깨버리자고 했다. 깨면 속이 시원할 거라고. 친구는 나를 보고 웃었다. 갑자기 야간작업을 하다 말고 접시를 깨버리자는 둥 접시를 깨는데 진심이었던 내 모습은 친구를 웃겼다. 깨져버린 접시에 그때의 근심과 걱정을 던지고 우리는 그 조각들을 다시 모아 쓰레기통에 넣어두고는 새벽 내내 예술관 뜰에서 뭘 해 먹고 살까를 이야기했다. 우리는 지금도 이따금씩 그때를 곱씹곤 한다. 여전히 서로의 이름 뒤에 말줄임표를 붙이며.


단풍이 한창인 어느 날은 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그곳은 물이 들만한 나무들이 거의 없어서 이미 벌거벗은 겨울의 풍경이었다. 떨어져 바스러지는 낙엽을 밟으며 걷는데 유난히도 붉은빛의 나무가 둘러싼 산책길 단풍 명소는 웃기게도 화장실 앞이었다. 사람들이 화장실을 둘러싼 그 단풍나무를 붙잡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번졌다. 이래서 해우소구나. 근심과 걱정을 덜어내고 나온 이의 마음에 빛으로 반짝이는 붉은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그렇다면 내가 버릴 것은 무엇인가. 또 내가 가져갈 것은 무엇일까.


설거지를 하다가 미끄러진 손에 그릇이 깨지면 나는 속이 시원하다. 내가 운을 열어야 할 일이 있나 보다 한다. 대개 머릿속이 어지러울 때, 일이 엎친데 덮친 격으로 몰아붙일 때, 되는 일이 없네가 입으로 튀어나올 때 개운법은 나름 도움이 된다. 개운법이라고 해서 부적을 산다거나 해괴한 미신을 행하거나 내 운을 상승시키고자 함이 아니다. 개운법은 일상의 환기에 있다. 생각이 넘쳐흐를 때는 걷는 것만으로도 개운하다. 걷다 보면 풀떼기에 시선이 뺏기고, 그러다 나무를 보게 되고, 그 나무들 옆으로 흐르는 물을 따라 생각을 흘려보낸다. 우울감을 비롯한 감정들은 수용성이라 씻는 것만으로도 개운하다. 쌓여있는 설거지는 씻어버리고, 근심과 걱정은 해우소에 버린다. 어질러진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흐트러진 머리를 단정히 빗는다. 아, 가끔은 큰 용량의 쓰레기봉투를 사서 쓰지 않는 물건들과 잡동사니를 비우는 것도 해묵은 마음을 정리하고 버리는데 도움이 된다. 그다음은 자질 구레한 것을 모으지 않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기껏 버렸는데 다시 쌓이면 치우는 것은 결국 나이기 때문이다. 그릇이 깨졌다고 불안해하지 말자. 깨진 그릇이 분리수거 함에 담길 때 들리는 쨍그랑 소리가 얼마나 개운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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