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나무의 아름다움은 분홍꽃비가 아니다

절정과 완숙에 대하여

by 함성희

우리 집 앞 벚꽃나무가 서서히 피기 시작했다. 지난주만 하더라도 그저 작은 꽃봉오리만 가지고 있던 나무에서 분홍 빛깔을 자랑하는 봄의 상징인 벚꽃이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참으로 신기하다. 어떻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스스로 꽃을 피우고 살아가는지. 보면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이제 1~2주 정도면 벚나무는 분홍 빛깔 꽃을 자랑하며 흐드러지게 피어날 테고 사람들은 분홍빛 꽃을 바라보며 저마다 웃음꽃을 피우고 그 웃음꽃을 나누는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참 아름다운 광경이지 않은가. 자연이 마련해 준 꽃이 나 그리고 우리에게 웃음꽃을 피워준다는 사실이 말이다. 정말 아름답고도 신기한 광경이다.



이처럼 매년 4월이 되면 벚나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다. 덕분에 수많은 카메라에게도 주목받으며 그 결과 TV, 전광판, SNS 등 수많은 영상매체에서 벚나무가 등장하고 각 벚나무마다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그런 아름다움을 보고 누군가는 '따봉'이라고 하겠지. '따봉'이라는 말이 어색하거나 이상한 단어라고 또는 처음 듣는 단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따봉'은 '최고'라는 뜻의 유행어였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한때 모든 방송매체에서 사용했었다. 그래서 중년을 지난 사람들은 아직도 '따봉'이라고 하면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것이다. 이렇게 시대를 타는 유행어처럼 우리 집 앞에 이제 막 아름다움을 뽐내기 위해 피어나는 벚나무도 아름다움의 절정인 꽃비를 내리며 시들어 갈 테다. 그리고 그렇게 내년의 절정을 준비하겠지.



하지만 벚나무의 아름다움의 절정이 분홍 꽃잎에 있다는 기준은 누가 정한 것인가? 벚나무도 그렇게 생각할까? 나는 '아니오'라고 말한다. 내가 벚나무를 잘 알기에 그렇게 하는 말이 아니다. 사실이 그렇다. 한번 생각해 보자. 벚나무는 날씨가 따뜻해짐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했을 뿐이다. 즉, 자연의 섭리에 따라 꽃을 피워야 하는 때가 되었으니 꽃을 피운 것이다.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사람이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러니 벚나무의 아름다움이 분홍 꽃에 있다고 생각한 것도 사람이다. 벚나무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분홍 꽃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벚나무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도 내 개인의 즉, 사람의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벚나무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정의한다. 벚나무의 아름다움은 수용이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4월이 지나면 벚나무는 초록색 옷을 입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벚나무를 찾지 않는다.



벚나무가 사람이라면 초록 옷을 입는 순간을 죽도록 싫어할 것이다. 어떻게든 분홍 꽃잎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단 한 명의 시선이라도 잡아두기 위해 안간힘으로 버티고 또 버틸 것이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지만 결국 분홍 꽃잎은 다 떨어질 것이고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은 사라질 것이다. 그럼 벚나무가 사람이라면 이때 절망감으로 가득 차 시들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벚나무는 다행히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다. 자연 그 자체인 벚나무는 분홍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수용하고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사라진 것도 수용한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묵묵히 해나갈 뿐이다. 그렇게 4월이 지나면 초록색 옷을 입을 뿐이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에 무관하게 그저 그렇게 자연의 섭리에 따를 뿐이다.



벚나무의 수용하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닐까. 하지만 벚나무와 같은 수용적 태도를 갖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하나는 알지만 모든 것은 알지 못한다. 벚나무의 아름다운 분홍 꽃이 피고 흐드러지는 것처럼 큰 관심과 사랑이 지나면 그만큼의 공허함이 남는 것이 당연한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 큰 관심과 사랑을 원한다. 우리는 절정만 탐닉하는 마약중독자와 같은 무지함을 보인다.



절정만 탐닉하는 삶은 어떤 삶인가. 나는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든 절정을 탐닉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확신한다. 나 부터도 항상 절정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예를 들어 주식을 투자할 때 투자가 아닌 투기를 하는 것과 같다. 투자를 위해서는 투자를 하기 위한 기업의 재무 상태를 알아야 한다. 재무 상태를 알기 위해서는 재무상태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하며 이는 기본적인 산수를 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즉, 산수에서부터 재무상태표 그리고 기업의 재무 상태까지 알아야 투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주변 사람의 이야기나 부정확한 뜬 소문을 바탕으로 돈을 건다. 그것은 투기다. 이런 투기의 현상은 항상 돈을 얻는 상황 즉, 배팅을 통해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박꾼이 절정의 중독에 빠져드는 원인인 돈을 얻는 상황에만 머물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도 이렇게 주식에 투기함으로써 돈을 날렸다.


이처럼 절정에 머물러 있기만 원하는 태도는 비단 주식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서 만연하고 있다. 은메달을 따고 울고 있는 우리나라 운동선수들, 2등은 필요 없다는 상사, 빚은 늘어가는데 명품은 계속 사는 명품족, 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정도까지 변형에 SNS에 공개하는 사람들 등등 모두 절정의 순간만을 위해 남들 보다 우위에 있기 위해 살아가는 태도는 결국 파국을 면치 못한다.



이런 문제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절정을 원하는 태도가 TV 광고와 소비를 해야만 유지될 수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해당 학습지만 풀면 항상 1등이라는 학습지 광고, 맥주를 마시면 모든 스트레스가 해소될 것 같이 말하는 술 광고, 커피 한 잔이면 모든 고민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은 여유 있어 보이는 커피 광고, 이 차만 타면 세상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는 자동차 광고 등 TV만 틀면 항상 절정의 순간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 약 30초마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렇게 내 잠재의식 속에 각인된 절정의 태도는 결국 내 삶의 태도를 절정만을 추구하는 태도로 변화시킨다. 나는 이 절정을 원하는 태도가 분홍 꽃비를 벚나무의 아름다움의 절정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벚나무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수용이다. 절정이 있으면 하락기, 정체기, 슬럼프, 공허함, 이완기가 있다는 것을 수용하자. 벚나무는 자신의 절정이 분홍 꽃잎을 날리는 시기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연의 섭리를 수용하며 그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순간순간이 벚나무의 진정한 아름다움인 수용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벚나무의 진정한 아름다움에서 배워야 한다. 절정만 바라는 태도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벚꽃잎에만 의미를 둔 순간의 삶이며, 수용하는 태도는 벚꽃잎이 다 지더라도 초록 잎을 피우고 굳건히 그 자리에서 계속 살아가는 단단한 삶이다.



이처럼 우리는 단단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단단한 삶이란 외부의 사랑과 관심에 휩쓸리지 않고 외부와 경쟁하지 않는 삶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신과 경쟁한다. 자신이 이겨야 할 상대는 남이 아니라 결국 '나'라는 것을 수용하며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런 실천을 계속할 때 외부로부터 압력에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자신만의 삶이 완성된다.



단단한 삶의 초석은 벚나무의 수용적 태도에 있다. 즉, 받아들임에 있다. 나의 못남과 잘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렇게 하나씩 받아들여 모든 것이 '나'라는 것을 수용하자. 그리고 못난 부분은 이전 보다 잘나게 잘난 부분은 이전 보다 더 잘나게 만들어가자. 이때 이전이라 함은 '이전의 나'를 의미한다. 수용을 통한 '이전의 나'보다 잘나게 만들어가려는 노력이 계속되면 우리는 비교를 끊어 낼 수 있다. 정확히 말해 외부와 비교를 끊어 낼 수 있다. 이것이 곧 자기수용의 목적이다.



벚나무의 수용적 태도를 통해 자기수용의 태도를 배운 당신은 이제 절정을 하나의 성과로 볼 수 있으며, 절정 이후에 다가오는 정체기를 또 다른 절정을 위한 완숙기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이 벚나무가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우리에게 알려주는 완숙하고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인 '수용'이다.



'나'를 수용하고 '우리'를 수용하고 나아가 '세상'을 수용한다면 이것이 단단한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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