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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뮤하뮤 Jun 07. 2024

마,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그거 먹어봤나?

외로운 한국인 트레커의 사치스러운 저녁

 다각다각하는 폴대 짚는 소리와 사람들 두런두런 말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나는 침낭을 목까지 올리며 창문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행렬을 본다. 우비를 입은 트레커들이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하기도 하다.  


 날이 흐린걸 보니 부슬비가 내리는 것 같다. 찌뿌둥하지만 오늘처럼 침대와 창문이 있는 곳은 백패커에게 5성급 호텔과 다를 바 없다. 오늘 밤은 별 수 없이 비에 눅눅해진 침낭을 덮고 역시나 축축한 텐트에서 자야 한다. 왼손으로 고양이 세수를 하며 오른손으로는 배낭을 뒤적이며 식량이 뭐가 남았나 체크한다.

미숫가루 조금, 식빵 몇 조각, 땅콩잼-거의 바닥, 견과류 한 줌, 그리고 그것(?)

걸으면서 너무 많이 먹어댔는지 먹을 것도 별로 없다.


 다음숙소까지 가면 이제 캠핑을 안 해도 된다. 숙소에는 근사한 레스토랑까지 있다던데 기다려라 내가 아주 부엌까지 탈탈 털어먹어줄 테다.  밤새 비워진위장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오전에 3시간 걷고 오후에 3시간 정도를 걸어야 도착하게 될 테니 나도 부지런히 준비해야 한다. 심심해서 엉터리 노래를 붙여가며 걷다 보니 의외로 빨리 도착해 버렸다.

비가 와서 나가서 산책도 못하고 누군가 모닥불이라도 피워두면 은근슬쩍 자리에 끼어보겠으나 모닥불의 모자도 안 보인다. 혼자 트레킹 하는 동양여자는 외롭기 짝이 없다.


 축축한 텐트에 누워서 있자니 나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비행기에서 이틀을 보내고 이곳까지 와서 고작 텐트에나 누워있는 걸까, 친구들과 가평 글램핑이나 갈 걸 그랬다 하는 생각이 빗소리처럼 들려온다.

허기는 지는데 지금 뭘 해 먹을 것도 없어서 땅콩잼 뚜껑을 연다. 거의 바닥을 보이는 땅콩잼에 슬퍼지는 것도 잠시, 얼른 숟가락을 꺼내서 대충 윗도리에 쓱쓱 닦는다. 입을 최대한 크게 벌리고 잼 한 스푼을 퍼먹고 낮잠을 청한다. 빨리 저녁 먹을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 보니 눈이 스르르 감긴다.


 잠깐 졸았나 주위를 살피니 땅거미가 지고 저녁을 먹겠다고 트레커들이 분주하다

뭘 먹나 곁눈질로 보니 주로 파스타를 해 먹는다.

파스타? 쯧쯧 그거 익으려면 오래 걸릴 텐데 나는 안타까워하며 중얼거린다.

오늘 내 저녁은 모두를 압도할 만한 기량을 가진 그것이다. 의기양양하게 불을 댕기고 물을 끓이려고 하니 라이터가 없다. 내적 의기양양은 사라지고 옆트레커의 관상을 살피며 말을 건다(글로벌적으로다가 적용되는 물건 잘 빌려주는 관상이 있다).


"저 지나가는 과객이 오만 오늘저녁 저에게 10초만 라이터를 빌려주신다면 당신의 가문 대대로 부와 축복이……“

"여기요."

"감사합니다."


 오늘을 위해 곰이나 퓨마에게 뺏길까 봐 꽁꽁 숨겨둔 라면 한 봉지를 꺼낸다. 그동안 나는 혹시라도 이 녀석이 다칠까 봐 푹신한 침낭을 완충재로 사용하며 소중하게 지켜왔다.  

이소가스를 버너에 연결하고 코딱지만 한 1인용 캠핑냄비에 불을 댕긴다. 물을 넣고 라면 수프를 흘릴세라 조심조심 봉지의 내용물을 털어 넣었다. 물론 봉지에 남은 가루는 검지손가락으로 야무지게 훑어 먹었다.


 뱃가죽이 등에 붙는 기분과 일주일 된 외로움이 뒤섞인 몸짓으로 수프를 휘적휘적 젓고 있으니 아까 라이터를 빌려준 트레커의 시선이 힐끔힐끔 느껴진다.

"이거 라면이라는 건데"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나는 봉지를 들어 보이며 설명한다.(얘, 너 겨울라면이 맛있단다. 느 집엔 이런 거 없지?)

옆 트레커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요리에 몰두한다.


그래, 뭐 잘 모를 수 있지. 라면은 말이다. <한국인의 소울푸드>이자 <내가 먹는 것보다 남이 먹는 걸 보면 더 맛있게 느껴져서 자기도 따라서 먹지만 기대보다는 맛없는 음식 1위(공동 1등은 짜장면이다)-기대보다 맛없다는 것뿐이지 정말 맛있다>이며 매운맛을 나타내는 공식적인 단위(예시: 매운맛 1단계- 진라면 순한 맛, 매운맛 2단계- 신라면 등)로 사용되기도 하는 한국의 국민음식이란다.


얼큰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라면이 끓는 소리는 그동안 빙하 흐르는 소리에 깨끗하게 씻긴 내 예민한 귀에 착착 감겨왔다. 작은 캠핑 냄비에서 부풀면서 바글바글 끓고 있는 내 꼬불꼬불한 면발이여, 나는 오늘을 위해서 그동안 식빵에 땅콩잼만 먹어왔을지도 몰라(하지만 땅콩잼 좋아한다).


 옆 트레커를 슬쩍 보니 아직 익지 않는 파스타와 씨름하고 있는 중이다. 이거 봐라, 나는 이제 먹을 건데. 넌 아직 멀었구나?

불을 끄고 캠핑 냄비를 버너에서 안전하게 내린 후 젓가락을 들고 잠시 바라본다. 빨갛고 뜨끈한 국물에 숟가락을 살짝 담그고 한입 퍼서 입바람을 후후 불어 식힌다. 입으로 가져가니 비 맞고 추위에 떨었던 위장의 아래바닥이 조금 뜨끈해져 온다. 본격적으로 젓가락을 들어 소중한 면발을 작은 스테인리스 컵에 옮겨 담고 후루룩 후루룩 면치기를 시작한다. 첫 번째 두 번째 젓가락은 몇 번 씹을 새도 없이 호로록 위장으로 직행해 버렸다. 정신 차리고 좀 씹어서 먹자며 나를 타이른다. 세 번째 젓가락질과 네 번째 숟가락질을 하니 한국인의 세포가 깨어난다.


한세(한국인의 세포): 크으, 이 뜨끈한 국물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야 며칠 동안 국물 하나 없이 견과류 바랑, 식빵만 먹는다는 게 한국인으로서 가당키나 하냐?

나: 아니? 나는 원래 평소에도 국물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안 먹는데?

한세: 그으래? 추울 때는 어떤 음식이 생각나?

나: 어묵탕

한세: 추적추적 비올 때는?

나: 바지락 칼국수?

한세: 약간 차가운 야외수영장에서 신이 나게 물놀이하고 나서는?

나:...... 라면

한세:(말없이 씩 웃는다.)

아!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국물의 민족 한국인이구나.


 평소라면을 먹더라도 완면(라면 면발과 국물까지 다 먹어야 인정)을 못하는 편인데 완면했다. 남은 국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기쁘다(물론 여기는 백패킹처럼 엄격하게 남은 음식물이나 쓰레기를 모두 들고 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백패킹하던 습관 때문에 국물을 다 못 먹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했다. 라면이 캠핑은 몰라도 백패킹에 적합한 음식은 아니다. 무게는 가벼워도 사치스러운 음식인 까닭은 라면을 끓이기 위해서는 많은 식수를 써야 하고 국물까지 남김없이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토레스 델 파이네 서킷을 돌며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대자연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비가 왔다가 눈이 오고 해가 떴다가 우박이 오는 등 날씨가 오락가락하는 것도 인간 사정과는 관계가 없다.

원래 내 것이 아닌 것을 맛보기 위해 욕심을 부렸다면 많은 것을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하고, 걷는 것은 혼자보다는 둘이 좋겠다는 것, 그리고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먹은 라면은 끝내준다는 것

나는 허리에 한쪽 손을 올리고 500ml 날진물통에 300ml 정도 남은 물을 100ml 나 꿀꺽꿀꺽 마시고, 하 -숨을 내뱉었다. 호랑이 기운이 솟아난다.


마,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라면 먹어봤나?

(까불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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