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뮤하뮤 Jun 14. 2024

Ho-mi를 손에 쥐고 호박부침개

밭 뷰 마리아쥬 노동쥬

  5평 농사를 지은 적이 있다. 8년 전쯤, 나와 친구 A는 도시농부의 부푼 꿈을 안고 텃밭을 분양받았다. 많이도 말고 딱 다섯 평만 하자, 그 당시 내 삶의 키워드는 지속가능한 지구, 자급자족, 환경 지킴이, 채식이었고 내 꿈은 '자연인'(내가 생각하는 자연인이란 농막 같은 데서 살면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사는 자이다)이었다.

농사를 연습해 보며 자급자족 자연인의 꿈에 한 발자국 다가서보자 했다. 아직은 농사 무지렁이니까 유튜브와 블로그를 찾아보며 공부도 했다. 유튜브와 블로그에 따르면 일단 뭔가를 심으려면 땅을 뒤집어엎어 흙을 부드럽게 해야 한다 했다. 나는 '힙한 어반 파밍 도구'인 The Ho-mi(호미)를 손에 들고 무작정 흙을 파댔다. 5평이라고 무시할 것이 아니다. 아무리 파내도 내 밭은 무한해 보였다.


씨앗을 심고 모종을 샀다. 발아가 잘되는 작물은 씨앗을 뿌리고 고추, 토마토, 가지, 상추 같은 건 모종을 샀다. 당시 다니던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밭에 가면 머리가 비워지는 것 같았다. 코끝에 은은하게 퍼지는 비료냄새, 호미로 흙을 들쑤실 때마다 혼비백산하며 기어 나오는 작은 생물들(생긴 것도 정말 다양하다. 네 서식지를 파괴해서 미안해), 풀냄새와 나무의 진액냄새, 먼지냄새와 새들의 깃털냄새 같은 것이 봄의 미지근한 바람에 실려와 얼굴과 손을 간지럽혔다.

정성스레 씨앗과 모종들을 심고 땅을 다독였다. 파종을 한 뒤 시간이 날 때마다 밭에 가서 싹이 났는지를 살폈다. 언제 모습을 드러내나 서성이면서 기다렸다. 어느 날 연두색 머리들이 쑤욱 올라오는 것을 기점으로 텃밭에 사는 식물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생장속도로 자랐다. '작물'도 작물이었지만 이 '잡초'라는 존재의 강인함과 빠른 생장속도는 정말 대단했다. 같은 식물인데 한쪽은 인간의 선택을 받고, 한쪽은 스스로 자연에서 왔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불합리한 현실에 반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한 감상도 잠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밭은 '잡초'라고 불리는 생물에게 잠식당하기 일쑤였다. 우리는 퇴근하고 틈틈이, 또 주말에 부지런히 가서 잡초를 뽑아주고 물을 통에 담아 날라 부어가며 고된 텃밭일을 수행했다.(하루라도 물을 주지 않으면 강렬한 햇볕에 땅이 쩍쩍 갈라 져버렸다)


텃밭을 분양해 준 주인 혹은 관리자는 말을 툭툭 내뱉는 사람이었다. 퉁명스럽게 땅 파는 방법도 알려주고 싫은 소리를 하면서 잡초를 제거해 줬다. 우리가 바쁘다는 핑계로 밭에 들르지 못할 때는 파란색 샤워기가 달린 통으로 땅에 물도 줘놓고 우리를 보면 잔소리를 했다.


비가 많이 오면 텃밭은 늪처럼 질척거린다. 장화를 신고 텃밭으로 출근을 한 어느 날 입구에서부터 예의 흙냄새와 풀냄새, 거름냄새사이에서 익숙한 기름냄새가 섞여난다. 그리고 치익-하는 반가운 소리

주인 혹인 관리자는 농막 옆 파라솔 테이블에 야외용 버너를 놓고 뭔가를 부치고 있었다.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아내면서 우리를 보더니 인사했다.


“이것 좀 맛보고 가세요.”

“뭐 하고 계세요?”

“호박이 많이 열렸길래 호박부침개했습니다. 따로 키우는 것도 아닌데 많이도 달린다니까요. “

나는 웬만하면 먹는 걸 사양하지 않는다(안 먹는 음식 빼고). 부침개는 또 내가 좋아하는 품목이다. 고인 침을 꼴깍 삼키며 빨간색 플라스틱 원형의자를 당겨 걸터앉았다.


여러 군데가 찌그러진 프라이팬에는 밀가루 반죽과 채 썰어진 호박과 썰린 부추가 잘 반죽되어 구워지고 있다. 그는 무심하게 나무젓가락을 내민다. 넙죽 감사하다며 젓가락을 받아 쥐고 종이 접시에 담긴 호박부침개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기름을 잘 먹어서 바삭바삭한 끄트머리부터 뜯어서 입에 넣는다. 그리고 밭 뷰. 맛있다.

“와, 뭐 넣으셨어요? 되게 맛있는데? “

“뭘 넣어요, 호박만 넣었지. 원래 밭에서 금방 구워 먹는 부침개가 예술이지, 아. 막걸리도 한잔 하실까? “

그는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농막에서 시원한 막걸리를 두 병들고 왔다.

“한잔만 주세요. 저희가 술을 잘 못해서.”

꼴꼴꼴. 종이잔에 희뿌연 막걸리를 채운다. 술맛은 잔치기가 아니던가. 우리는 데면데면한 표정으로 종이잔을 부딪히며 건배를 하고 한 모금 마셨다.


크. 이 시큼하고 알싸한 맛, 평소 막걸리를 좋아하지는 않는데 지금의 조합(금방 구운 호박부침개, 밭 뷰)에는 최고의 주종인 것 같다.

한잔만 마셨을 뿐인데 얼굴이 벌게지며 취기가 올라온다.

“어우, 취할 것 같은데요, 오늘 밭에서 할 일 많은데.”

“막걸린 노동주라 괜찮습니다. 오히려 밭일이 잘돼요. “

“그렇군요, 밭일 잘하게 막걸리 잘 먹고 싶네요(아무 말),“

우리는 텃밭농사를 주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호박 부침개를 먹었다. 노릇노릇 잘도 구워진걸 세장이나 얻어먹었다.


“정리는 제가 할 테니 이제 일 보세요.” 그가 살짝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잘 먹었습니다. 해지기 전에 밭일을 마무리해 보겠습니다. “ 우리는 많이 벌게진 얼굴로 일어나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그동안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뽑아야 한다. 키가 많이 자란 가지와 토마토에 대놓은 지지대를 손봐야 한다. 파란 플라스틱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 물도 줘야 한다. 우리는 장화를 고쳐 신고 비장한 표정으로 우리의 넓디넓은 5평 밭으로 걸어갔다.

오른손에 호미를 단단하게 쥐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