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T 아닙니다…..
제주에 가면 늘 찾게 되는 음식이 있다. 걸쭉하고 뜨거운 카키색 국물에 칼국수면이 얌전하게 똬리를 틀고 있다. 카키색국물의 정체는 보말을 갈아서 국물로 낸 것으로 바다의 짭조름한 맛과 담백한 풍미가 느껴진다. 비린내가 나지 않을까 싶은데 생각보다 맛이 깔끔하다. 보말은 바다 고둥이다. 제주 보말은 종류도 다양하다고 한다. 썰물 때 나가면 갯바위나 돌 틈에 보말을 많이 볼 수 있다.
여행사에 다니던 지인이 제주에 둥지를 틀었다고 했다. 바야흐로 올레길 열풍이 뜨겁게 불어올 때다. 올레길도 걸을 겸 지인도 방문할 겸 제주로 갔다. 5월 제주의 날씨는 특이하다.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나무와 풀들이 뜨듯하고 차가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제법 눈요기가 된다.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제주 대정읍으로 갔다. 대정읍은 마늘이 많이 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눈만 돌리면 주변이 온통 푸르른 마늘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늘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만 보던 눈이 시원해진다.
소매과 바지를 걷고 바위틈으로 걸어 들어갔다. 보말을 잡아서 라면에 넣어먹자고 했다. 인간의 유전자에는 ‘채취’가 새겨져 있는 걸까? 우리는 다소 열정적으로 보말을 발견해서 바구니에 넣는 행위에 몰두했다. 고개와 허리를 푹 숙이고 바위틈만 보자니 허리와 목이 아파온다. 고개를 들고 뻣뻣한 허리도 좀 폈다. 주위를 둘러보니 울퉁불퉁하고 검은 바위에 파도가 와서 부서진다. 존재감과 부피감이 대단한 구름이 하늘의 땅 아래에 있는 생명들을 조용히 내려다본다. 참으로 고요한 오후다. 바닷물에 발도 담갔겠다 끊었던 담배 한 대를 얻어 피우고 싶어졌다.
나는 지인에게 담배를 하나 꿨다. 그는 한 개비를 건네주고 다시 보말잡기에 몰두한다. 이 양반아, 라이터도 주셔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악 소리가 난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바위에 발을 헛디뎌 급한 대로 손을 짚다가 손가락을 바위에 벤 것이다. 검지손가락에 빨간 피가 솟는다.
어디 봐요. 와, 진짜 아프겠네. 나는 주머니를 뒤져서 멀쩡한 휴지가 있는지 찾아봤지만 없다.
그만 나갈까요? 물어봤더니 나가지는 않겠단다. 급한 위기 상황은 넘겼으니 웃옷 주머니에 넣어둔 담배가 생각난다. 라이터 좀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라이터를 주면서 구시렁대기 시작한다. 요즘 같았으면 이런 T, 너 C야?라는 욕을 얻어먹었을 터(티냐고 묻는 것은 특정 상황에서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을 탓하는 것이다. 욕설과 함께 시와 티의 자리를 바꿔준 것) 역시 너는 정이 안 간다는 둥 사람이 인정머리가 없다는 둥 한소리를 들으면서 오랜만에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 꽁초는 주머니에 넣었다. 그 후로도 그는 나만 보면 너는 역시 정이 안 가라는 말을 진심으로 했고 나는 그냥 웃었다.
우리는 물에서 걸어 나와 라면에 보말을 손질해서 넣어먹었다. 맛은 그냥 그랬다(라면은 그 자체로 원래 맛있는 법). 커다란 냄비에 끓인 5인분의 뜨거운 라면을 넷이서 후후 불어가며 먹고 있자니 누군가 모슬포 5일장에 엄청나게 맛있는 보말칼국수가 있다고 했다. 보말칼국수를 먹어본 적이 없으니 무슨 맛인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말로만 듣던 제주 5일장을 가본다니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한다.
나는 시장을 좋아한다. 어느 지역이든 시장에 가면 날 것 그대로의 풍경을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 5일장은 그야말로 축제다. 알록달록한 생활용품부터 예쁜 꽃들, 가성비 좋은 의류와 잡화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골목마다 늘어서 있다. 호떡이나 어묵, 떡볶이도 왠지 육지와는 때깔이 다른 것이 더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서 보말칼국수를 시켰다. 영원한 기다림 끝에 음식이 나왔다. 떨리는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걸쭉하고 진한 국물을 먼저 떠먹어본다. 오, 생각보다 맛있는데요? 크림파스타를 먹는 것처럼 살짝 느끼하며 고소한 풍미가 있다. 면을 삼분의 일쯤 건져 먹었다 싶으니 이제 다른 맛을 추가해서 먹고 싶다. 다진 청양고추를 요청해서 국물 위에 살살 뿌렸다. 매운 것도 잘 못 먹는 주제에 칼칼한 것을 또 좋아한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뜨거운 칼국수를 김치와 함께 야금야금 먹었다. 뜨거운데 시원하다. 시원하고 뜨겁다. 어제 술은 안 마셨지만 해장하기에도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제 얼추 면을 거의 건져먹었다. 배는 이미 부른데 아직 아쉬움이 있다. 사장님께 공깃밥을 하나 건네받아 반을 말아본다. 국에 밥 말아먹는 거 평소라면 내 스타일이 아니다. (콩나물 국밥도 밥 따로 국 따로 먹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왠지 남은 국물에 밥을 말아야 옳게 느껴진다. 숟가락으로 야무지게 밥과 국물을 잘 섞어준다. 밥알 사이에 보말국이 스며든다. 먹기 알맞은 온도로 식은 밥과 국물을 또 야금야금 먹다 보니 커다란 그릇이 다 비워졌다.
향토음식을 먹는 것은 여행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가격이 저렴하고 소박한 음식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보말칼국수는 아주 적당한 음식이다. 한 그릇 안에 바다와 해초의 향, 땅에서 나는 밀가루가 조화를 이루며 담겨있다. 거기에 약간의 사치를 부린다면 촉촉하게 찐
만두나 바삭한 매생이 전을 곁들여 먹는 것도 좋다. 반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제주 생막걸리 같은 걸로 입가심하며 식사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제주에 사는 이들은 요새 고사리 채취가 제철이라며 고사리를 꺾다가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라는 말을 했다. 부른 배를 안고 고사리를 쫒는 모험을 하는 사람들을 상상하다 보니 이들의 말소리가 멀어지고 고개가 절로 떨어진다. 꾸벅꾸벅. 나른하기 짝이 없는 보말의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