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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뮤하뮤 May 29. 2024

15세 이온의 ‘디어 다이어리’

감자에서 10만 원짜리 기타 산 썰 푼다.

 오늘따라 유난히 알레르기가 기승을 부린다. 오늘의 날씨는 이 세상 사람 모두가 행복감에 젖어서 사진을 찍어댈 만큼 청명한 날씨다. 그런데 왜 나는 오늘따라 유난히도 콧물을 흘려서 이토록 불행한가

훌쩍대며 한강 둔치에 누워 소설 <쿼런틴>을 읽고 있었다. 알레르기는 우주 어디에서 왔을까. 쿼런틴 세계관에 따르자면 무한하게 확장하며 ‘퍼져있는 복수의 나’ 중에서 나머지를 수축시켜 소멸시키고 남은 나의 버전이 겨우 이토록 콧물을 흘려대는 나란 말인가. 왜 하필이면 이 아름다운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햇살을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는 내가 남았는가 말이다.


 아까 먹고 나온 알레르기약 때문에 정신이 몽롱해진다. 양자역학, 이온, 모드, 확장과 소멸- 소설책에서 읽었던 개념이 위아래 위위 아래아래 (어디서 많이 들은 케이한 음악 같다고? 이건 소설에서 빌려온 인용 문구이다, 어떤 실험 장면 중에 나온다.) 방향으로 흩어지며 포콰이(등장인물 중 하나)의 음성 같은 걸로 발성되는 걸 들으며 잠에 들었다.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시간에 갇혀 있다가 한기가 들어 잠이 깼다. 여전히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날씨로군. 그런데 왜 난 이다지도 불행한가. 그건 바로 알레 알레 알레르기—

수축하면서 어딘가 맹한 나만 남은 것 같다. 그때 알람이 울린다. <알트 기타 10만 원>


 업장에 대여 기타가 한 대 더 필요해서 감자(중고거래사이트)에 며칠을 키워드 알림을 걸어놨다.

‘한 번도 안친 새것이지만 오래되었다’라는 설명과 함께(뭔가 열린 교회 닫힘이나 기계로 직접 뽑은 수타 냉면 같은 느낌 아닌가?) 사진 몇 컷이 같이 올려져 있다. 사진을 쓱쓱 넘겨보다 일단 이 모델이 괜찮기도 하고 일단 사서 리페어 샵에서 한번 세팅받으면 되겠지, 하고 채팅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거래 가능한가요?

네 안녕하세요, 가능합니다.

오늘 몇 시쯤 가능하세요?

6시쯤 가능합니다.


1분 만에 거래가 성사되었다.


 글과 사진을 보고 나는 이렇게 짐작했다.


사춘기의 아들이 뭔가에 물들어서 갑자기 기타를 샀다(정확히는 부모님이 사줬다). 감격스러워하는 것은 잠깐이고 곧 잊힌 다른 물건들과 함께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 공간에 처박히고 말았다가 시간이 흘러 그 아들이 군대에 갔는데 간만에 봄맞이 대청소를 하던 어머니가 그 기타를 발견하고 사춘기 시절의 귀엽지만 속을 알 수 없어서 나도 모르게 화가 나는 바이브에 애증 한 스푼을 끼얹은 듯한 그 시절의 아들이 생각나 잠시 미소 짓고 감자 앱을 켜서 다음과 같이 글을 쓴다.
기타는 잘 모르지만, 한 번도 안친 새것, 오래된 거지만 올립니다…….


 우아한 커트 머리의 홈드레스를 입은 사람이 나올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허쉬컷에 카고팬츠를 입은 젊은이가 발랄하게 인사하면서 온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기타 한번 보세요(기타 케이스를 씩씩하게 내밀며).”

‘세상에 기타 케이스도 멀쩡하니 새것이네.’


케이스를 열어 기타를 보니 헤드며 줄감개며 매우 새것의 느낌이 난다. 그동안 안치고 방치되어 있어 줄 높이가 많이 떠 있긴 하다.

하지만 세팅 받으면 되지 않을까? 안일한 생각으로 입양을 결정한다.


“언제 구매하셨어요?”

“아, 제가 중학교 때 음…. 제가 지금 30이니까 15년 되었네요. 15년 전에 부푼 꿈을 안고 기타를 샀는데, 아시죠. 부푼 꿈, 그 막 멋있게 치는 그거요, 그런데 진짜 손가락으로 한번 좌장 튕겨만 보고 가지고만 있었어요. 거짓말 안 하고 줄 한번 쳐본 게 다. 그런데 그 후로 한 번도 못 치고 방에다 두기만 했는데 어느새, 그러다 엄마의 등짝 스매싱과 방에 자리도…….”

(오, 박찬호도 울고 갈 입담으로고)

“와. 15년 동안 그냥 두고만 계셨다고요?”

“네! ㅎㅎㅎㅎ(해맑게 웃는다.)


 나는 돈을 보내고 일단 기타를 데리고 왔다. 소리가 나는지 확인해 봐야 하니까 앰프에 기타와 케이블을 연결하고 전원을 넣었다. 튜닝을 해도 오랫동안 튜닝을 안 해둬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줄감개가 반짝거리지 않는 광택이 없는 느낌의 금속이라 뭔가 마음에 든다. 헤드도 얄팍하고 날렵해. 나는 ‘튜닝이 잘되기를 바라며’ 다시 튜닝을 했다(이것도 쿼런틴 세계관에 따라 간절히 바라봤다).


 어느 정도 맞는 소리가 나자 엄청나게 지판과 줄의 간격이 높긴 하지만 아무거나 연주해 보기로 한다.

so nice(summer samba의 다른 이름, 보사노바 곡이다.)가 생각나서 이 곡을 멜로디만 쳐봤다.

‘정말 멋져 너란 기타는 정말 멋져 15년 동안 가방 안에 처박혀 있긴 했지만, 소 나이스

너란 기타는 여름의 삼바-호우호우(추임새)’

이런 느낌으로 기타 줄을 튕기며 기타에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본다.


 그리고 15년 동안 자신의 방 안에서 기타를 유기했던

15세 소녀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내 빈약한 상상에서 나온 다른 평행우주일 뿐, 절대 현실은 아니다).

성은 이 씨, 이름은 온

그때 소녀의 취미는 다꾸(다이어리 꾸미기)였다.


2009년 x 월 x일

내 일기장에게, 안녕 내 이름은 이온이야. 너의 이름을 온이로 붙일게. 내 이름을 거꾸로 한 거야.

나는 15살이고 중학생이야.

내 꿈은( 갑자기) 기타리스트야.

나는 기타를 연습해서 짱이 될 거야. 짱이 돼서 다 패버릴 거야.


2009년 x 월 x일

내 일기장에게,

이제 3만 원만 더 모으면 내가 사려고 했던 기타를 살 수 있어. 나를 응원해 줘.


2010년 x 월 x일

내 일기장에게

드디어 내가 바라던 기타를 손에 넣게 되었다. 나는 내일부터 기타를 연습할 거야.


2010년 x 월 x일

내 일기장에게, 나는 오늘 너무 속상해. 중간고사를 망쳤거든.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그 애가 다른 애랑만 말해.

내 삶에는 희망이 없는 것 같아.


201x 년 x 월 x일

고등학교 생활은 너무 힘들어. 숙제도 많고 수행도 너무 많아. 아 얼른 대학생 돼서 놀고 싶다.


그 후의 기록은 없다. 이제 디어 다이어리 ‘온이’와의 필담 시간은 바쁜 하루의 스케줄에 없기 때문이다.

이온은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대기업이거나 유망 스타트업) 회사에서 타고난 끈기와 센스로 최연소 팀장이 되었다.

엄청나게 큰 건을 (해외) 바이어에게 따내서(?) 자축하며 오랜만에 연차를 낸 이온은 엔스타(소셜미디어)에 오늘의 기가 막히게 청명한 하늘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을 올린다.


그저 앞만 보며 쉼 없이 달려온 지난 15년
이제야 나는 나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뜬금없지만 나는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온의 (기타 바디에 비닐도 뜯지 않은) 알트 스트라토캐스터 기타는 2024년 5월

알레르기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좀 이상한 사람에게 오게 된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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