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청춘은 그저 그런 어른이 돼서 반찬을 두 번 리필한다.
흐읍 흐으읍. 최대한 숨을 내뱉는다. 골반을 뒤트는 고문을 받는 도중 머릿속에는 끝나고 뭐 먹지라는 고뇌가 소용돌이친다. 하루종일 앉아있는 골반은 시멘트처럼 굳어있다. 무릎을 접어 포개고 양발을 양손으로 잡고 있는 자세는 그야말로 순수한 고통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떡볶이로 저녁을 먹고 말았다. 허기가 지는 것이 당연하다. 수련을 마치고 요가원 1층에 있는 밥집으로 들어간다. 몸보신을 해야겠다. 황탯국을 시킨다. 오전 11시 오늘의 첫끼다.
몸에 남아있는 뻐근하지만 기분 좋은 통증을 진정시키며 컵에 물을 따라 마신다. 한숨 돌리고 있으니 빠른 속도로 밥상에 밑반찬이 깔린다. 밑반찬은 빨갛게 무친 오이무침, 역시 빨갛게 무친 콩나물무침, 역시 빨갛게 볶은 가지나물과 빨간 양념으로 담근 열무김치다. 내 앞에 놓이는 스테인리스 밥그릇에 담긴 밥. 그 어떤 합격 목걸이보다 기쁘다. 수저를 들고 밥을 한 수저 크게 퍼 입에 넣는다. 첫 번째 고른 반찬은 오이무침이다. 오이씨를 제거하고 새콤달콤하게 무쳤다. 두 번째 숟가락으로는 가지나물을 반찬으로 먹었다. 가지나물은 빨간 양념이 골고루 배어있다. 세 번째 숟가락에는 콩나물무침을 집어 얹었다.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는데 벌써 황탯국이 커다란 국그릇에 담겨 나왔다. 뽀얀 국물에 길고 큼지막한 황태와 하얀 두부, 투명해진 무가 건더기로 있다.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밥과 건더기를 부지런히 먹는다.
어제 비가 많이 온 영향인지 오늘의 날씨는 청명하다. 어제 오랜만에 극장에 가서 소마이 신지 감독의 <태풍클럽>이라는 영화를 봤다. <태풍클럽>은 태풍으로 고립된 학교에서 분출하는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욕망을 그린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는 비가 그쳐있었다. 연습실에 들렀다가 집에 갈 때는 비가 많이 내렸다. 나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올 적에 내 마음은 사춘기 소녀 같았다.
뭐라도 일어나라 제발.
밥을 씹으면서 어제의 느낌을 다시 떠올려봤다. 비가 주룩주룩 바람이 펄럭펄럭.
그 왜 태풍이 오기 전 기압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어딘가 살짝 맛이 가있지 않은가. 개인의 내면과 사회적 집단의 내면에 쟁기질을 하듯. 모두 아닌 척 하지만 뭔가 큰일이 일어나길 빌고 있다.
빨갛고 새콤달콤한 오이무침을 씹다 보니 태풍이나 왔으면 좋겠다 하는 소녀의 대사가 떠오른다. 나도 저 나이 때 아니 더 어릴 때에도 저런 대사를 친 것 같은데. 매미 유충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자신을 내맡긴 채 나무에 매달린다. 유충의 등껍질이 갈라지며 매미가 느릿느릿 몸을 뒤틀며 조금씩 빠져나온다. 여리디 여린 희멀건한 연둣빛 매미, 연약할 데로 연약한 매미는 탈피하는 순간을 어떻게 인식할까(물론 인간이 아니니 인식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모르겠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등껍질이 갈라지면서 외계인처럼 전혀 다른 존재가 튀어나오는 과정이 청춘이 아닐까. 어린이시절 별 불만 없이 사용했던 몸과 마음을 어른이 되기 위해 허물고 다시 짓고 하는 일의 연속, 그것이 사춘기겠지.
내 사춘기의 몸과 마음 특히 뇌 안은 언제나 거센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거나 하는 것 같았다. 마음에 태풍이 불든 말든 어김없이 학교로 가야 하고 학교에서는 의자와 책상에 앉아있어야 했다. 늘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울렁울렁 일렁이는 마음은 어른들을 비웃으며 손톱을 물어뜯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었다. 물론 비가 오면 친구들을 꼬셔 비를 실컷 맞으며 뛰어다니기도 했지만.
여기 반찬 좀 더 주세요. 열무김치를 제외한 빨간 계열의 가지, 콩나물, 오이무침을 모조리 리필한다. 반찬은 한번 정도는 리필해야 한다. 크흑.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원하는 바를 당당히 말하는 어른이 되었구나(고작 반찬이지만). 사춘기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어른이 된 너를 먹여 살린 건 8할이 매식이고 이렇게 이름 모를 이들의 온정에 기대어 살고 있다고(물론 돈은 내야 한다.)
남은 뽀얀 황태국물을 후루룩 마시며 다시 <태풍클럽>의 장면을 생각한다. 소녀의 찢긴 옷을 보고도 네가 용서할 거지?라고 묻고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너 같은 어른은 안될 거야 말하던 오만한 청춘.
선생은 너도 어른이 돼봐, 별수 없어.라는 식의 대사로 화답한다.
나도 엄마 같은(아빠 같은, 너 같은, 선생 같은, 어른 누구 같은) 어른은 안 되겠다.라고 몇 번이나 무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던가. 어른이 되어보니 나도 별일 없고 별거 없고 별수 없다. 그래도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뿐이다.
이 영화는 1985년작으로 지금 보면 불편하고 요즘 상식으로는 이해 안 되는 장면들이 많다. 특히 형편없는 여성관이라든가, 변태 같은 카메라워크라든가, 뜬금없는 음악 삽입이라든가(물론 음악들은 아주 좋다. 맥락이 없을 뿐이지). 야, 너 이런 영화 연출하는 남자랑 결혼가능? ㄴㄴ 안 가능이라는 실제 대화를 화장실에서 들었다. 아마 2024년의 여자들은 1985년에 연출된 일본 영화를 견뎌낼 항마력이 부족할 것이다.
그래도 영화를 보고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로 청춘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또 영양만점 황탯국을 먹으면서 고통과 혼돈으로 가득 찬 내 청춘을 되돌아볼 수 있었고 리필한 빨갛게 무친 계열의 반찬들을 남김없이 해치웠으니 배를 두드리며 만족한다.
나는 어른이 된 내게 만족한다.(어느 정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