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 수박, 참외
어둠이 충분히 내려온 여름 저녁, 가족들이 하나 둘 평상으로 나와 앉는다. 뜨거운 낮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시고 제법 시원한 바람도 불어온다. 수박(참외로도 대체 가능) 썰어 쟁반 가득 담고 소금과 설탕을 넣고 삶은 옥수수도 내온다. 모기향은 마법진을 그리듯 평상에 앉은 자들을 모기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부채를 손에 들고 앉아서 옥수수를 오물오물 먹다가 목이 마르면 수박을 옴뇸뇸 먹는다. 할머니는 무릎을 베고 누운 손주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무서운 이야기를 실감 나게 해 주실 거다. 나는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운 기억이 없고 가족들과 평상에 나와 옥수수와 복숭아 수박 등을 먹은 적이 없지만 어째서인지 그 기억들이 내 기억인 것 같다. 여기저기서 많이 본 이미지라 그럴 수도 있고 부모님이나 조부모님들의 기억이 내게 남아있나 보다.
친구집에 놀러 갔더니 친구가 그릇에 세 가지 종류의 여름을 담아내어 줬다. 나는 그것들을 여름 삼합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릇에는 동그랗게 썬 참외와 이등분한 옥수수, 깍둑 썰기한 수박이 놓여있다. 여기에 냉매실차를 같이 마셔도 좋고 가벼운 레드와인을 곁들여도 좋겠다. 나는 이것을 먹으면서 여름이 제법 좋아졌다.
<옥수수>
옥수수는 키가 크며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란다. 그리고 옥수수밭 배경의 공포나 SF 콘텐츠가 은근히 많다. 일단 스티븐 킹의 소설 <옥수수밭의 아이들>, 천선란의 소설 <옥수수밭과 형>, 크리스토퍼 논런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 또 뭐 있더라? 잭 힐디츠 감독의 영화 <1922>, 빈센조 나탈리 감독의 영화 <높은 풀 속에서> 정도가 생각난다. 옥수수밭의 미로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 정말 무섭지 않은가. 나 같은 길치에게 풀숲이라는 공간은 충분히 밀실공포를 극단으로 보여주는 장소가 될 수 있다. 무서운 이야기와 여름은 궁합이 잘 맞다. 그래서 옥수수가 여름에 먹으면 맛이 좋나 보다(?)
이 키 큰 옥수숫대에서 겹겹이 껍질을 두르고 있는 길쭉하고 뾰족한 열매를 수확한다. 여러 겹의 껍질을 벗겨내면 수염이라고 부르는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있다. 껍질과 수염을 제거하면 가지런한 이빨이 씩 웃는 것처럼 알알이 박힌 알갱이들이 존재를 드러낸다. 옥수수를 삶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나는 옥수수를 삶지 않기 때문에 생략한다. 내가 삶은 옥수수를 구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지하철 근처에 작은 점포들이 있는데 튀김, 공갈호떡, 과일주스 등 다양한 품목들을 취급하는 점포들이 쪼르르 서있다. 그중에 한 곳은 옥수수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데 커다란 옥수수 세 개를 비닐봉지에 담아 놓은 것이 2000원이다. 껍질과 수염을 제거하고 알맞은 간으로 삶아서 포장까지 해주는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저렴한 금액이다.
<수박>
혼자서는 어림도 없다. 2인 가족도 어림없다. 적어도 네 명은 모여야 수박을 잡을 용기가 난다. 사람 머리의 두 배정도 되는 무시무시한 크기, 녹색에 검은 줄이 있는 단단한 껍질 안에 새빨간 과육이 가득 들어있다. 가끔은 맛이 밍밍한 수박을 만나기도 하는데 요새는 당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처리를 하는지 어떤 수박을 먹더라도 기본은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운이 좋으면 그중에서도 유난히 과즙이 시원하고 단맛이 좋은 군계일학 수박을 먹을 수도 있다. 수박을 먹기 위해서는 몇 가지 의식을 행해야 한다. 먼저 경건한 마음으로 손을 들어 수박에게 노크한다. 똑똑. 이때 노크를 하는 행위는 ‘렛미인’ 나를 허락해 달라는 정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아님). 노크를 했을 때 맑고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 잘 읽은 수박이라고들 하는데 두드려봐도 애매한 느낌뿐, 뽑기 운이 안 좋은 나는 수박이 나를 잘 골라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수박을 자르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수박을 꼭지를 중심으로 반을 갈라주고 엄마를 부른다. 아니면 수박을 싸들고 손이 야무진 친구네 집으로 간다. 양손에 수박을 쥐고 먹는다.
<참외>
그나마 참외가 공략하기가 쉽다. 수박보다는 만만한 크기에(보통 과일들보다는 큰 덩치이긴 하다) 노란 껍질을 벗기기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감자 깎는 칼을 쓰면 더 쉽게 껍질을 벗겨낼 수 있다. 과육의 긴 쪽을 도마에 놓고 칼로 일정하게 썰면 가운데에 달콤한 부분과 씨앗들이 있는 형태가 된다. 과육의 긴 쪽을 세로로 넣고 칼로 한번 썰고 반대쪽으로 길게 칼로 썰면 보트 모양의 길쭉한 네 등분의 형태가 된다. 내가 선호하는 방법은 두 번째 방법이다. 보트모양의 참외를 타고 여름나라를 항해하기 위해서다. 는 아니고 나는 참외씨앗을 먹으면 배가 어딘가 살살 아파오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씨앗과 아주 가깝게 붙어있는 참외의 가장 달콤한 부분을 포기해야 한다. 네 개의 길쭉한 보트를 포크로 사로잡은 후 그대로 아삭거리며 먹어도 좋겠고, 사용자 편의를 위한 조각 썰기에 돌입할 수도 있다. 어렸을 때 봤던 어떤 소설에서는(정확히 기억 안 난다) 참외를 우물가에서 씻어 노란껍질째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먹어치우는 장면이 나온다. 어린 마음에 참외를 이렇게도 먹을 수 있구나 놀라워했다.
* 금요일 저녁, 정다운 이들과 여름삼합을 드시길 바랍니다. 이 여름이 좋아질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