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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 Oct 18. 2020

이제 서른을 시작하며





스물 여덟 때의 일이다.


편의점에서 마실 것을 고르려는데 진열된 음료들이 영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매장을 한바퀴 정도 더 돌고 나서야, 나는 ‘1+1’ 행사중인 초코우유 두 개를 마지못해 진열대 위에 놓았다.


결제를 끝내고 카드를 건네받으려 하는데, 내 옆으로 웬 꼬마 한 명이 쪼르르 다가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매장 바깥에 어머니로 추정되는 분이 의자에 앉아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 꼬마에게 사회성을 길러주고자 심부름을 시키신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가 결제를 끝낸 초코우유를 손에 드니 아이의 눈은 이내 초코우유에 붙어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너무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잠시 멈칫한 뒤에 우유를 그의 눈 앞에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하나를 건네주었다. 세상을 다 가진듯한 미소와 함께 아이는 밖에 있는 엄마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나갔다.


그 분은 아이의 손에 우유 하나가 더 들려있다는 것을 아시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이를 다시 돌려주려고 하셨으나, 나는 괜찮다며 계속 손사래를 쳤다.


- 아이고 안그러셔도 되는데...

- 아유, 뭐 별 것도 아닌데요.

- 너무 감사합니다.

 아들? 형아한테 고맙습니다~인사해야지?


- 아저씨, 고맙습니다.





‘아저씨’라는 호칭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순간이었다.

순수한 아이가 ‘형아’라는 가이드를 받고도 부득이 ‘아저씨’를 골라썼으니 이제는 정말로 서른이 올 때가 됐다고, 나는 생각했다.


인생이 청춘의 20대를 넘어 아저씨라는 장에 들어서는 때는 누구에게나 퍽 아쉬운 순간임에 틀림 없다. 비록 각자의 이유는 달랐어도, 나와 친구들은 모두 서른과 아저씨라는 명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내 경우는 표현이 조금 애매할 수는 있지만, 마치 내가 아직 아저씨는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아저씨가 된다는 공포로 인해 나의 합리가 현실 부정 단계에 안착한 것은 아니다. 이는 내가 어렸을 때 서른 즈음의 아저씨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막연한 이미지에 기인하는데, 간단히 말해 지금의 내 모습이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닌 것 같다는 불안감이다.


학생 시절에 느꼈던 서른 살의 형들은 묵직하고 과묵했으며, 수염의 두께와 생김새가 터프했고, 의젓한 자세에, 자신의 인생 전반에 대해 그럴싸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완연한 어른의 무거운 이미지였다.


이를 비교값으로 두니, 나의 모습과 행동거지는 아무리 좋게 쳐주어도 마치 십대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수염조차도 남성 호르몬들이 삐친 것마냥 비열하게 난다.




실제로 고등학교 이후 나의 성격과 사고의 방향에는 이렇다 할 큰 변화가 없다. 싫은 것은 여전히 싫고, 싫은 것을 싫다고 표현하는 방식조차도 그대로였다. 야채를 싫어했던 나는 야채를 싫어하는 이유에 조금 더 객관적인 근거를 붙여 설명하는 정도의 어른이 됐을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필두로 괜스레 요새는 이렇게 할아버지가 되면 어떡하나...라는 찌질한 걱정을 하게 된다. 내 말투와 성격 그리고 행동들에 하얀 수염과 주름들을 붙여보니, 세상에나 이런 공포영화가 따로 없다.


어쩌면 서른이라는 나이는 이전과는 다르게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한 때일지도 몰랐다. 2차 성징에 따라 목소리가 굵어지고 키가 자라면서, 나는 외형적인 변화에 맞는 최소한의 행동 양식 정도는 갖추려 노력했던 것 같다.


굵은 목소리를 갖게 되니, 공공연한 장소에서 경박하게 욕설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큰 키에 수염까지 붙인 채로 불쾌한 감정을 부득이 드러내면 이를 보는 타인이 곱절로 불쾌해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내 몸의 변화가 선도해 이끈 수동적인 모습에 불과했다.




서른은 주민등록상으로나 그러하다고 인정될 뿐, 이렇다 할 외면적 변화는 기실 없다고 보는 편이 무방했다. 서른에서 마흔까지, 혹은 아버지가 되기 전까지의 삶은 결국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다분히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결정들의 총체였던 셈이다.



나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가?


내가 겪었던 어른들의 모습을 통해, 나는 분명 나이만 든다고 해서 모두가 어른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배웠다.


그렇기에 서른은 어쩌면 나이를 두려워해야 할 시기이기도 했다. 먹어가는 나이를 자랑스러워할 것이 아니라, 나이의 개수만큼 자신을 돌아 볼 저만의 기준들을 확장해나가는 것. 그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일지도 몰랐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그 광활한 방향성을 두고 온전히 스스로 나 자신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할 시간이 된 것이었다. 또한 그것이 어쩌면 서른이 된 내가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과업일 터였다.



어떤 삼십대를 보낼 것인가?

잘은 몰라도, 오늘만큼은 어제보단 떳떳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그것 마저도 마냥 쉽지는 않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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