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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Sep 26. 2023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두번째

빗소리에 잠에 깼다. 주기적인 불면이다.

어젯밤에 글을 마무리 않고 저장만 해 둔 탓인지 두 명의 남성이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꿈을 꾸었다.

나와 또 다른 나의 마주함인가? 소설의 '내'가 꾼 꿈처럼 생생했다. 


방대한 페이지수에 비례하듯, 차고 넘치는 생각을 온전히 하나의 글로 표현하기 벅차, 오늘은 무라카미의 책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를 엮어나가려고 한다. 사적인 이야기가 많이 담겼던 저번 이야기와는 달리, 이번엔 오롯이 작가와 책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뜬금없는 개조식 서평.


1. 무라카미하루키는 정신적인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망라하는 모티브를 기본으로 소설을 쓰는 듯하다. (베르나르가 고양이, 개미, 꿀벌, 전생, 샤머니즘에 집착하듯이) '기사단장 죽이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상황과 현실적 상황의 절묘한 교집합이 큰 축을 이룬다. '에필로그'에서 작가가 말하길, 글을 쓰는이는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다. -솔직하고 대담한 고백에 큰 감명을 받았다.


2. 주인공이 중년남성이다. 이는 그의 전체소설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중년남성이 갖는 고독함, 외로움, 책임감, 그리고 사회의 시선에 큰 무게를 두고 있으신 듯하다.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이질적으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멀리두고 생각한다면, 현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3. 문장이 짧으며 간결하다. 그리고 날카롭다. 세상에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그만의 특유한 묘사에 때론 섬찟하다. 바늘 같은 찬 공기, 침묵을 위한 침묵, 궁극적인 개인도서관.. 작가의 글귀를 필사하며, 그 아름다운 묘사를 내 것으로 소화하고 싶다. 그리고 아름다운 단어선택. 이것은 옮긴이가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짝꿍처럼 함께하는 옮긴이에게 감사한다.


4. 태양빛에 노출된 알비노인처럼 두 번 다시 찾아올 수 없는 사랑에 큰 무게를 두고 있다. 

다소 건조해 보이는 그의 필력에 '사랑'이라는 내용이 소설을 관통한다는 것은 실로 균형을 맞추기 위한 치밀한 계산, 혹은 그의 지난날의 아픔이 아니었나 감히 유추해 본다. 사랑에 대한 내용은 너무 세부적으로 묘사가 돼있어서 읽는 이의 마음까지 설레게 한다. 마치 지금 나의 뮤즈가 모래턱이있는 강가에서 함께 발로 그림을 그리며 내 옆에 어깨를 나란히 기대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5. 반전에 반전의 요소가 빠지지 않는다. 얇지 않은 그의 책을 읽다 보면, '헉'이라는 소리가 육성으로 터져 나온다. 미리 줄거리를 읽어보지 않아야 할 작가 중 하나다. 때론 소름이 돋는다. 엄청난 반전을 20글자가 채 되지 않는 문장으로 마무리하기 때문이다. 

엄청난 단락임에도 불구하고 단호함과 냉소로 끝맺는 문장, 그래서 난 이 작가를 사랑한다.


6. 그림자와 본체.

내 그림자이자 본체가 새벽에 노트북에 앉아 글을 쓸수 있듯이, 그의 그림자와 본체 또한 본연의 삶을 살아간다. 누가 본체이고 그림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삶 앞에 놓여가는 레일을 최선을 다해 달려갈뿐. 

어렵게 말을 꺼내지만, 사실 꿈에서의 나는 '내'가 본체인지 그림자인지 알수 없을때가 있다. 누구나 자신의 본질에 대해 의심을 품을 때가 있다. 작가는 그 틈새를 그림자와 본체의 이분법 혹은 교집합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래서 난 위안을 얻는다. 지금 내가 본체이던, 그림자이던 그건 중요치 않다. 그림자는 그림자대로의 온연한 삶을 살것이고, 본체는 본체대로 삶의 레일을 밟고있으니, 내가 둘중 무엇이라도 개의치 않게된다.


7. 전체적으로.

짜임새와 서사가 완벽한 소설이었다. 문장또한 버릴것이 없었다. 이런 책을 자주 발간해주시면 좋으련만, 5년동안 작가와 만나지 못함으로 생긴 공백과 목마름이 컸었던건 사실이다. 소장가치가 충분하므로 빌리지 않고 직접 내 책으로 읽는것을 추천하고싶다. 

'내 책'이 주는 장점으로는 꼬장꼬장 마음에 드는 구절에 포스트잇플래그를 붙일수 있다는 장점이있다. 그렇게 책이 내 서가에 꽂히면 두고두고 또 만날수 있고, 또 내아이의 스펙트럼에도 무라카미의 저자명이 스쳐지나가지 않을까 한다.

아래로는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기준에 주옥같은 문장들이다.



# 걸으면서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있는 건 그저 기분 좋은 공백이었다. 혹은 無였다. 눈의 예감을 품은 싸늘함이 무쇠팔처럼 내 의식을 호되게 추궁하고 지배했다.


#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말하자면 마음의 일부가 뜨거운 빛에 노출된 셈입니다. 타버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더욱이 그 사랑이 어떤 이유로 도중에 뚝 끊겨버린 경우 라면요. 그런 사랑은 본인에게 둘도 없는 행복인 동시에 어찌 보면 성가신 저주이기도 합니다.


# 계속 살아간다, 라는 레일이 제 앞에 깔리고 만 겁니다.


# 이파리를 떨어뜨린 나뭇가지가 괴로운 듯 한 차례 신음했다. 나는 캐시미어 머플러를 목에 단단히 고쳐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겨울의 태양은 온 힘을 다해 빛과 온기를 지상에 던지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했다.


# 그 슬픔에는 아픔이 없다. 그저 순수하게 슬플 뿐이다. 


# 옐로 서브마린 소년... 그 자신이 그대로 하나의 자립한 도서관이 될 수 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궁극의 개인 도서관.


# 그의 곁에는 소녀가 있을까? 그녀는 그때처럼 난로에 불을 지펴서 그를 위해 방을 덥히고, 그의 약한 눈을 치유하는 진한 쑥색 약초차를 만들어 줄까? 그렇게 생각하자 어렴풋한 슬픔을 느꼈다. 그 슬픔은 온도가 없는 무색의 물처럼 알게 모르게 내 마음을 적셔갔다.


# 나는 그 입가 가까이 귀를 갖다댔다.

그순간, 인형이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고개를 뻗어 순식간에 내 귀를 꺠물었다. 귓불이 찢어진줄 알았을 만큼 세게, 깊게, 힘껏. 고통이 실로 격렬했다.


# 요컨대 그가 사는 세계에는 리얼과 비리얼이 기본적으로 이웃하며 등가적으로 존재했고,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그것을 꾸밈없이 기록했을 뿐이다?


# 무언가가 시작되려는 걸까?

나는 무언가가 시작되지를 원하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이 상태가 끝없이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시작된 변화는 - 그게 어떤 종류건- 더이상 멈출수 없는게 아닐까, 그런 예감이 들었다.


# 작가의말 중.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한 작가가 일생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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