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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Sep 24. 2023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정호승 시인님의 읽어보지 않은 시집을 이잡듯이 뒤져 발견한 책.

95년도 쯤에 발간된 시집이라, 아직 덜 다듬어진 느낌이다. 나쁜말이 아니라, 정호승시인만의 그 특유의 색, 문득문득 나오는 섬뜻한 구절이 많았다.


어떤 시는 읽다 눈을 감았다. 극적으로 표현된 구잘이너무 읽기 힘든 시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정호승 님의 시가 좋다.

한없이 부드럽고 서정적이다가도 갑자기 벼랑으로 내리떨어지는듯한 시적언어가 날 무엇인가로부터 해방시켜준다.


# 봄눈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다른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절벽위를 무르프로 걸어가지 말라

봄눈이 내리는날

내 그대의 따뜻하 집이 되리니

그대 가슴의 무덤을 열고

봄눈으로 만든 눈사람이 되리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것은

사랑과 용서엿다고

올해도 봄눈으로 내리는

나의 사람아



# 삽

사람들이 삽을 버리고

포크레인으로 무덤을 파기 시작한다.

새벽부터 산꼭대기까지 기어올라와

포크레인이 공룡처럼 으르렁거리며 산을 무너뜨린다

피를 흘리며 진달래는 좀처럼 신음소리를 내지 않는다

야외용 돗자리와 청주 병을 들고 산을 올라와

상주들은 포크레인이 무덤을 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

누구에게나 하관의 시간은 짧다

김밥할준 든 일회용 도시락 눕히듯 땅속에 아버지를 눕히고

서른이 넘도록시집 안간 막내딸이 눈물로 진달래를 꺽어 관위에 던진다.

소주를 마시며 잠시 쉬고있던 포크레인이 다시 몸을 뒤튼다

둔중한 굴삭의 손을 들어 아버지의 무덤을 내리찍는다

오 , 아버지는 두번 죽는다

얼마나 아플까, 저 잔인무도한 굴삭의 주먹

평생동안 아버지는 굴욕만 당하고 살았는데

막내딸이 포크레인 아플 가로막고 나동그라진다

막 피어나려던 잔털제비꽃도 나동그라진다

나이든 상주들은 말없이 막걸리만 들이켠다

어허 달구 노랫소리는 흐르지 않는다.

포크레인에 짓이겨진 어린 진달래여

공동묘지 위를 나는 어린 까미귀여

아버지의 죽음에는 삽이 필요하다

줄담배를 피우며 비오는 날마다 흙이 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저 곤고한 아버지의 삽질을 위해

삽으로 파묻는 죽음의 따스한 손길을 위해



# 배가고프다


모래를 먹는다

배가고프다

모래의 물을 마신다

목이마르다


멍든 해당화의 손을 잡고

바닷가 기슭으로 기슭으로만 치달려도

배가고프다


내가 얼마나 모래를 먹어야

바다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모래를 먹어야

소금이 될 수 있을까


바위는 모래가 되어 제이름이 없어지고

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제이름이 없어진다


모래를 먹는다

배가고프다

다시 모래의 물을 마신다

목이마르다

오늘은 바다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 실크로드

발없이 걸어서간다

무릎없이 기어서간다

배가고파 낙타의 똥을 먹는다

낙타가 내얼굴에 침을 뱉는다

길잃은 쌍봉낙타여

천산북로는 어디인가

달이 뜨지 않고 목이 마르다

붉은 모래를 또 먹는다

전생에 그대와 나를 잇는 비단길 하나 있었던가

삶도 없이 죽음에 이를까봐 두려워라

언제나 비극이 오는것을 알았지만

막을수는 없었다

나는 한낱 짐승일뿌

눈물의 짐승일 뿐

짐승처럼 그대를 사랑했을 뿐

길잃은 쌍봉낙타여

천산으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 모두 드리리


그대의 밥그릇에 내 마음의 첫눈을 담아 드리리

그대의 국그릇에 내 마음의 해골을 담아 드리리

나를 찔러 죽이고 강가에 버렸던 피묻은 칼 한자루

강물에 씻어 다시 그대의 손아귀에 쥐어 드리리

아직도 죽여버리고싶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지

아직도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 어려운지

미나리 다음듯 내 마음의 뼈다귀들을 다음어

그대의 차디찬 술잔 곁에 놓아 드리리

마지막 남은 한 방울 눈물까지도

말라버린 나의 검은 혓바닥 까지도

그대의 식탁위에 토막토막 잘라 드리리



# 강물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것이 물이다

상의 용서도 용서함도 구하지말고

청춘도 청춘의 돌무덤도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길이다

흐느끼는 푸른 댓잎하나

날카로운 붉은 난초잎하나

강의 중심을 향해 흘러가면 그뿐

그동안 강물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었다 절망이었다

그동안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강물이 아니었다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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