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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Feb 25. 2024

칼자국 - 김애란

정수지 그림

김애란 님의 문장은 서슬이 퍼렇다. 다정하다 싶을 때 곤두박질치는 문장들이 많다. 그래서 김애란 님의 소설을 사랑한다.

김애란 님 마음속의 차가운 방 한켠이 내게 위로를 건넨다. 너도 차가운 방 하나쯤 있지 않느냐고. 

내 차가운 방은 요즘 텅 비어있다. 나의 이드(id)가 들어갈 차례이다. 요즈음 나의 이드는 고삐 풀린 망아지다. 마음 같아서는 냉탕에 푹 담구었다가 정신을 못 차릴 때쯤 꺼내고 싶은데, 내 마음대로 잘 끌려오지를 않는다. 


이런 내 사정을 아는지, 지인이 그림을 선물해 줬다. 

이드와 슈퍼에고

정신없이 열매를 먹고 배부르다 배고프다를 반복하는 이드와, 그걸 메타인지처럼 바라보는 슈퍼에고.

다만 본능에 이끌리는 이드를 그저'바라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이드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이드를 관찰하고 인정하는 것. 그로 인해 내 몸뚱이 전부가 이드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

나에게 꼭 필요한 조언이었다.


사설이 길었다.

그리하여 당분간 말랑말랑한 책들과 시집은 피하려고 한다. 그래서 고른 책이 김애란 님의 칼자국이다. 그녀의 차가운 방에 나의 이드를 잠시 들여다 놓을까 하여.


평생 칼국수집을 운영하던 엄마와 딸의 에피소드로 엮어진 짧은 단편소설이다. 마음만 먹으면 한 시간 내로도 읽을 수 있는, 우리와 가까이 있는 소설이다. 색인 800번대가 어려우신 분들에게 추천한다. 아, 김애란 님의 문장은 이렇구나, 이런 것이 단편소설이구나, 소설도 꽤 재미있는걸? 하며 입문하시기에 딱 좋은 책.

그녀의 문장을 몇 자 남겨보려 한다.


# 썰고, 가르고, 다지는 동안 칼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동안 내 창자와 내 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 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내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


# 큰 다라이 안에 상체를 박고 양념을 버무리던 어머니의 모습은 가게 앞 오랜 풍경중 하나였다. 어머니는 다라이로 통하는 저 지하세계에 빠져들지 않으려 버둥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어머니가 잘 익은 배추 한 포기를 꺼내 막 썰었을 때, 순하게 숨 죽은 배추 줄기 사이로 신선한 핏물처럼 흘러나오던 김칫국과 자그마한 기포를 기억한다. -중략- 입속으로 들어오는 어머니의 손가락 맛이랄까. 살 맛은 미지근하니 담담했다. 식칼이 배추 몸뚱이를 베고 지나갈 때 전해지는 그 서걱하는 질감과 싱그러운 소리가 나는 참 좋았다.

어둑한 부엌 안, 환풍기 사이로 들어오던 햇빛의 뼈와 그 빛 가까이에 선 어머니의 옆모습, 그런 것도.


# 칼은 도마 위를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어머니의 손을 빨랐고 칼 박자는 경쾌했다. 어머니와 칼은 젊고 단단하니 닮은 구석이 있었다. 어머니가 칼을 쥐고 음식을 만드는 모습에는 어딘가 실랄한 데가 있었다. 나는 종종 그 신랄함의 정체가 뭘까 생각하곤 했다.


# 어느 날 나는 내가 진정으로 배를 곯아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리둥절해진 적이 있다. 궁핍 혹은 넉넉함을 떠나, 말 그대로 누군가의 순수한 허기, 순수한 식욕을 다른 누군가가 수십 년간 감당해 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웠던 까닭이다.


# 나는 광 냄새가 싫었지만 나 먹을 것은 그 안에 다 있었다. 먼지 낀 유리병 속의 마늘 장아찌나 숨 죽은 파김치, 복수심을 안고 포복해 있는 간장게장과 독 안에서 꿈처럼 출렁이며 익어가는 물김치를 볼 때면 내가 아주 옛날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먼 지 낀 환풍기는 느릿느릿 돌아갔다. 어머니는 바닥에 구부정히 앉아 칼을 갈았다. 나는  어머니를 보며 웅얼거렸다

"어머니는 좋은 어미다. 어머니는 좋은 여자다. 어머니는 좋은 찰이다. 어머니는 좋은 말(언어)이다."라고


# 그류.


# 칼은 도마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조용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닳고 닳아 종이처럼 얇아졌지만 여전히 신랄하고 우하한 빛을 품은 채였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식욕이 밀려왔다. 뭔가 베어 먹고 싶은 욕구. 내장을 적시고 싶은 욕구. 마침 시렁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사과 몇 알이 보였다. 나는 한 손에 사과를 다른 손에 칼을 쥐었다. 자루는 손에 꼭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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